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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보고서 22 립한 사립학교의 열악한 교육환경과 기부금 등을 이용한 불법적 교육비 전용을 철저히 막겠 다 는 것이었다. 전국에 설립된 사립학교의 수가 4~5천 개소였고, 이중 1,708개 학교가 1909년 4월 인가 를 신청했으나 인가된 학교 수는 242개교에 지나지 않았다. 사립학교의 신설도 허가하지 않았 다. 일제는 기존의 사립학교도 공립으로 전환하도록 유도하며 식민지 교육체제를 정착시켜 나갔 다. 그동안 전국 수천 개의 사립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애국심과 국권회복의 식 을 고양시키자, 제도적으로 탄압한 것이다. 1909년 현재, 충북지역 각 시군별 교육기관 현황 을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1909년충북지역각종교육기관현황> 구분 공립학교 사립학교 종교학교 서당서재 일인소학교 계 청주 1 8 5 70 3 87 문의   4   5   9 충주 1 4   71   76 괴산   1 1 25   27 단양   1   28   29 보은   3       3 연풍   1       1 영동       43 1 44 영춘   1   13   14 옥천   1   8   9 음성   2   11   13 제천   2   11   13 진천   2 1 14   17 청산   1   11   12 청안   1   38   39 청풍   3   2   5 황간 1 1   15   17 회인   1   20   21 계 1 21 2 239 1 264 한말 망국의 위기에 들불처럼 번졌던 근대 사립학교 설립운동은 교육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 했다. 교육의 영역을 계급과 학문적 차원에서 실용적이고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확장시킨 것이다. 이 시기 모든 근대 사립학교의 설립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 제 와 친일 부일배 또한 근대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다. ‘근대교육’이 가지는 양면성에도 불 구 하고 민족운동가들은 근대교육으로 민지를 깨우쳐 민족정신을 불어넣고 국권을 회복시키고 자 노력했다. 일제의 민족교육 탄압과 식민지 교육체제로의 전환 정책 등으로 1910년 경술국치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