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page

충북독립운동사개관 19 ㉢ 후기의병 후기의병은 1907년 정미칠조약, 헤이그 특사를 빌미로 한 고종의 강제퇴위, 군대의 강제해산 들이 요인이 되어 크게 일어났다. 특히 구한국 군대의 강제해산은 의병전쟁에 새로운 전기가 되 었다. 일제는 이해 7월 말에 이미 각 지역에 일본군을 추가 파병하여 해산을 감독하고 병영을 접수 하도록 했다. 지역 진위대 해산 전에는 미리 한국군 장교를 시켜 한국군의 탄약과 총기를 압수 하도록 했다. 원주진위대와 강화도분견소 병사들은 전원이 무기를 들고 일본군의 접근을 불허 했다. 홍주분견소 병사들은 무기를 소지하고 집단적으로 병영을 이탈했다. 청주지역에도 대전 에서 일본군이 추가 파견되었다. 진위 제2대대 본부인 청주진위대는 1907년 8월 3일 청녕각 앞뜰에서 해산식이 거행되었다 . 해산식이 있기 전인 7월 26일 일제는 청주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포착하고 대전 수비대에서 하 사 이하 15명을 파견하기도 했다. 7월 27일에는 한국군의 해산을 감시할 일본군 보병 제14연 대 1소대를 청주로 보냈다. 청주진위대의 강제 해산광경의 기록은 그 분통함을 잘 보여준다. 7) 군대해산 이후 의병전쟁은 ‘자유전쟁’, ‘국민전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8) 8월 중순 이후 해산 군인들은 청주와 보은 등 지에서 기의한 韓鳳洙와 盧炳大 의진에 의병으 로 투 신했다. 의병전쟁의 진압군이었던 군인들 이 근대식 전술과 무기로 의병대열에 합류하면서 의병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韓鳳洙 는 해산군인 출신은 아니나, 9) 청주진위대가 해산되자 이해 9월경 해산군인을 모아 의 병으로 참전한 이래 1910년 2월까지 2년 6개월여에 걸쳐 충북 일원과 강원, 경북 일대에서 26 회의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는 1910년 피체되어 사형을 언도받았고, 복역 중 이른바 ‘ 合邦大 赦令’으로 출옥하였다가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다시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다. 따라서 한 봉수는 의병투쟁으로부터 3·1운동으로 전승되는 독립운동의 맥락을 실증적으로 예증하는 인 물이라 할 수 있다. 10) 의병화한 진위대원의 참전으로 일본인과 친일분자들은 일본군의 무력보호 속에서 겨우 생 활 을 할 수 있는 정도였다. 8월에는 청산에서 3백 명, 옥천에서 60명의 의병이 활동하였고, 충 주 에서는 의병이 두 차례에 걸친 혈전 끝에 6백여 명의 일본군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 였다. 11) 이밖에 속리산의 노병대, 충주·음성·제천의 朴汝成 등의 활약이 기록에 보인다. 이처럼 의병의 활동이 본격화되자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는 충 주에 중 무 장한 대대병력을 급파하여 양민을 학살하고, 보은 일원의 261호, 문의 일원의 1백여 호를 방화하는 등 야만적 7 청주진위대는 지방 8개 대대 중 제2대대로서 예하에 공주와 홍주분견대가 있었으며, 병력은 장교 7명, 하사 및 병졸 15 3명 등 160명이었다(一記者, 1926년 6월호, 「軍隊解散」, 『新民』第14號. 8 趙東杰, 1989, 「義兵戰爭의 韓國民族主義上의 位置(下)」, 『한국민족운동사연구』3. 9 종래에 한봉수는 해산군인 상등병 출신으로 알려졌다. 이는 일제 측 자료인 『朝鮮暴徒討伐誌』의 ‘元鎭衛隊 上等兵 出身’ 이란 기록의 오류 때문인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10 朴杰淳, 1996, 「義兵將 韓鳳洙의 抗日鬪爭」, 『한국독립운동사연구』10, 263~290쪽. 11 淸原郡誌編纂委員會, 1990, 『淸原郡誌』, 1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