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page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174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1927년과 1930년에 청주농업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과 학생운동을 전개한 곳 충청북도 청주시 영동79 청주공업고등학교 충청북도 청주군 청주면 영동 청주농업학교 건물 멸실 - 청주농업학교에서는 1927년 9월 22일부터 4학년생 35명이 일본인 교장 고산( 高山)의 무성 의한 교육태도를 배척하기 위해 동맹휴학에 돌입하였다. 이에 당황한 학교 당국은 학생들을 찾 아 나섰으나 찾을 수 없었다. 당시 학생들은 강서면 신대리에 집결하여 있었는데, 학교 당국자 가 현장으로 오자 다른 곳으로 이동해버렸다. 이에 교장은 학생들이 등교한다면 어떠한 처벌도 하지 않겠다고 학부형 대표에게 약속하였다. 이 약속을 믿고 학생들은 9월 27일, 전원이 등교 하였다. 하지만 교장은 약속을 어기고 학생 1명은 퇴학, 2명은 5일 정학, 3일 정학에 처하였다. 1930년 1월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여파가 청주에까지 파급되었다. 1월 21일에는 광주학생 운동의 여파로 아침 조회시간에 전교생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어깨동무를 하고 교문 밖 으로 뛰쳐나갔고, 청주고보 학생들도 밖으로 나와 청주공업학교 학생들과 합류하였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일제 경찰의 제지로 인해 진로가 막힌 500여 명의 학생 시위대는 무심천 일대에 서 일제 경찰과 대치하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수 천여 매의 격문이 배포하였다. 이날 일본인 학 교인 청주고녀에 다니던 조선인 여학생 30여 명도 동맹휴학으로 학생시위에 동참하였고, 상인 들의 철시를 단행하여 학생의 시위에 호응하였다. 또한 1931년 9월 4일에는 청주농업학교에서 격문 살포와 만세시위가 있었다. 이날 아침 오전 8시경 농업학교에서 조회가 끝나자마자 어느 3학년생이 붉은 기를 들고 연단에 올라가 시내에 배포된 격문의 내용과 같은 연설을 하고 만세를 선창하자 일부의 학생들이 호응하였다. 이때 농 업학교 학생 조중만(趙重晩)·송재린(宋在燐 )·류장열(柳壯 烈)·이철순(李喆淳)·김영기(金榮基 )·이 수영(李壽永)·남정진(南廷鎭) 등 7명, 청주고등보통학교 학생 3명, 시민 45명이 체포되었다. 당시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청주농업학교의 위치는 청주농업고등학교 홈페이지의 학교연혁을 통해 1923년부터 1938년까지는 현재 청주공업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청주농업학교 터 학생운동지 학생운동 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