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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166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1931년 6월 14일 내수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전개한 곳 충청북도 청원군 내수읍 마산리 171 내수초등학교 충청북도 청주군 북일면 마산리 내수공립보통학교 건물 멸실 현충시설(내수초등학교 독립운동기념비) 1931년 6월 14일 내수공립보통학교 내의 오동나무에 ‘독립만세’라는 격문이 부착되었다. 격 문을 발견한 학교와 일제 경찰은 의심이 가는 5학년 담임 홍봉희( 洪鳳喜 )를 비롯하여 5학년 학 생 윤경훈(尹慶勳 , 14세)·4학년 학생 윤성훈( 尹成勳, 12세) 등을 잡아가서 철야 취조하고 가택 수색을 실시하였다. 일제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평소 항일의식이 있었던 인사들을 탄압하는 구 실로 악용하였다. 괴산청년동맹 증평지부 간부 양희득( 楊喜得 )·송용섭(宋容燮), 청주군 북일면 오동리 이종복(李宗馥 )의 집도 가택수색하고 서적을 압수하였다. 또한 홍봉희가 담임을 맡고 있던 5학년 급장 임노선(林魯善 , 18세)의 집도 가택수색을 하였고, 그와 친분관계가 있던 이종 복을 청주경찰서로 구금하여 취조하는 등 압박하였다. 결국 이 일은 임노선의 소행으로 밝혀졌으나, 홍봉희는 강압을 견디지 못하고 사직서를 제출 하자 그가 담임하였던 5학년생 40여 명은 만일 홍봉희 교사를 유임시키지 않으면 수업을 거부 하겠다고 하며 퇴교하여 맹휴투쟁에 돌입하였다. 당시 주재소에서는 이 사태를 중시하고 인근 주재소로부터 응원까지 받으며 주도 학생들의 체포에 나서 5년생 5명, 6년생 1명을 검속하여 취조하였다. 그러나 맹휴가 계속되자, 일제는 검속한 학생을 즉시 석방시키고 학부형회를 열어 대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내수공립보통학교는 1917년 11월 사립 내수보통학교로 개교하였다가, 1919년 9월 공립 내수 보통학교로 개칭하였다고 하며, 현재의 내수초등학교의 전신이다. 학교의 위치는 개교 이래 바 뀌지 않았다고 하여 위치를 확정하였다. 일제강점기 지형도에서 보면 내수역 앞에 학교가 표시 되어 있는데, 이곳이 내수공립보통학교를 표시한 것으로 판단된다. 내수공립보통학교 터 동맹휴학지 학생운동 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