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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눌 노상직은 경남 밀양(密陽)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 등이 작성한 파리장서에 유림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노상직은 일찍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이건승(李建昇)을 비롯한 우국지사들과 동족을 지도하며 국권회복의 방도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년여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밀양에 사연서당(泗淵書堂), 자암서당(紫巖書堂)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던 중 1919년 파리장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에 참여하였다.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는 이 거사는 곽종석을 비롯한 영남유림과 김복한(金福漢)을 비롯한 호서유림 13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던 강화회의에 제출한 것이었다. 그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김창숙이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중국 상해(上海)로 파견되었다. 마침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 김규식(金奎植)이 프랑스 파리에 파견되어 있는 사실을 확인한 김창숙은 김규식에게 독립청원서를 발송하고 강화회의에 제출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이 독립청원서는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북 성주(星州)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노상직은 파리장서 서명 이후 밀양 영남루 곁에 있던 헌병대에 구금되어 고초를 겪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