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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의하여 독립운동이 사실 그대로 전해지고 민족자결주의에 대처하는 민족진로에 대하여 직격한 의견이 전개되었다. 뒤이어 기미독립선언이 서울에서 전해지가 당시 30세인 공의 강혈은 끓었다. 평소 규합해오던 동지들과 청년학생 기독교 유지와 모의하여 의사를 결심하고 준비에는 많은 독립선언문과 경고문을 등사하였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동원에는 책임분담하여 준비물은 배부되었다. 때는 4월 8일 10시를 기하여 일제히 봉기된 목포지구 독립만세 메아리는 천지를 진동하였고 시위는 크게 펼쳤다. 일제는 경찰과 헌병을 동원시켜 난타제지하니 많은 애국시민이 검거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고 기소된 동지는 20여 인사였다. 공은 주모일원으로 목포감옥에서 1년 6월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여 1921년 3월에 중국망명길을 나섰다. 두만강을 건너서 간도 길림 봉천 북경을 표전하여 1923년 5월 상해임시정부 국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니 임정경륜과 항일투지에 감명받았다. 동년 상해에서 의열단에 입단활약하다가 국내항쟁을 다짐하고 익년 1월에 귀국하자 의열단연맹으로 검거되다. 1927년 4월 3일 동아일보기사에 기미운동이후 조선초유의 비밀결사사건으로 체포되어 치안법위반으로 경성감옥에서 1년 6월 옥고를 치르다 출옥하여는 호남평론사 기자로 입사하니 김가고파로 가성명하여 출판언론을 통한 논봉은 일제불의에 항쟁하였다. 신간회 목포지회장으로서 민족운동에 주도하니 1931년 7월 9일 검거되다. 시대의 풍운아로 전전하면서 지난과 인고의 삶에 반려로서 내조의 후광이 되었던 합부인 김해김씨는 경진(1940) 11월 5일 유명을 달리하니 목포 후산자좌원에 잠드시다. 공은 기구한 역경에서도 맹지를 하식하랴. 1941년 3월 출판법 보안법 치안법위반으로 검속되어 목포형무소에 수감중 옥고끝에 1942년 임오 5월 20일 순사하니 53세였다. 오매간 잊지못할 구국단심은 맥맥히 이어 을유광복 3년앞이었다. 희라 주권잃은 비극이오 무언의 저항으로 예상하니 유인 김해김씨요에 쌍분하였다. 계자에 종태요 여적에 경주최의호이며 손은 준한이라 1982년 8.15광복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