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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휘하에 있었다. 성장하여는 족조 묵암 정운공과 소암 종희공에게 수학하고 나아가 이만구 선생에게 종학하여 크게 학문이 성취하였다. 선생은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근검절약하고 농감에 철저하는 등 치산에도 유의하여 부모를 봉양하고 조선을 치제하는 등 사에 조금도 소흘함이 없었고 문중의 돈목과 대소가의 호합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선생은 그 식견과 경륜이 공공사회를 위하여 이바지할만 하였으나 당시 국내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진작 서구고학문명을 수용한 일본이 바야흐로 제국주의적 침략의 마수를 뻗쳐 우리의 국권을 박탈하고 우리 국민과 국토를 여지없이 유린하고 있었다. 그 억울하고 통분한 세월이 10년이 지난 1919년 파리세계평화회의 개최를 계기로 우리의 자주권을 부르짖으며 그 동안 쌓이고 쌓인 민족적 울분을 터뜨린것이 우리의 역사적인 3.1독립만세운동이다. 이 거족적 만세운동에 발맞추어 이나라 유림들이 일본의 간교함을 만천에 폭로하고 우리의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장문의 성명문을 파리세계평화회의에 제출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파리장서사건이다. 이 장서는 영남 유림을 대표한 곽종석공과 호남유림을 대표한 김복한공을 필두로 하였으니 전국의 유림대표 137인이 연서로 제출되었다. 선생은 바로 그 연서 중의 한분이시다. 당시 왜인들의 총검앞에 우리의 생명이 초개시 된던떄라 생사를 초월한 정의감이 없이 어찌 서명이 가능하였으리오 여기서 선생의 열화같은 의기를 볼수있다. 이 장서는 김창숙선생을 통하여 김규식선생에게 전달되어 평화회의에 제출코자 하였으나 일인의 간교한 와교술로 인하여 무위로 끝나고 이를 계기로 일인들의 압제는 더울 가혹하여 장서에 연서한 우리 지사들의 육체적 정신적 고초는 이루 말 할수가 없었다. 선생도 또한 예외일수가 없었다. 일경의 악형으로 불치의 병인을 얻은채 여생을 양암 박돈 어산 김희록 공산 공준필 와산 김영학 백괴 우하구 이고 최우동 등 당대의 짓 명류들과 우국의 정을 나누다가 1927년 9월 27일에 서세하시니 향년 63세였다. 선생의 서세후 100년이 가까워오는 지금에도 후진들이 선생의 높은 뜻을 잊지못하여 추모비를 세우고자 하여 불령에게 그 비문을 청하기에 위와 같이 정리하였다. 생각컨대 이 비는 불의를 매도하는 상징으로 중류의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