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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주남선, 주남수)은 서훈이 되었으나, 맏형인 주남재 선생은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서훈되지 않았다. 주남재(朱南宰)[1878~1958]는 1878년 5월 6일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에서 태어났다. 3·1 운동 이후 거창으로 이주하여 조선 일보 거창 지국의 기자, 지국장을 지내면서 활발한 지역 운동을 전개했다. 동시에 거창읍 교회에 출석하는 기독교인이었다. 1920년대 이후에는 거창의 청년 운동에 주력하였다. 1920년 거창 청년회를 창립하고, 300여 명의 회원과 2만여 원의 자금을 모집하여 계몽 강연회, 재외 동포 돕기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거창 청년회는 1925년 혁신 대총회를 연 후 1926년 거창 청년 회관을 준공하였다. 거창 청년회는 거창 시민 대운동회를 개최하고, 청년 독서회를 열었으며, 공창·흡연·아편 폐지 운동, 연극 공연, 음악회 개최, 도서관 개설 등의 운동을 벌였다. 주남재는 1925년 거창 청년 회관에서 무산 아동을 위한 보성 학원을 열고 80여 명의 학생들에게 보통 교육을 실시하였다. 보성 학원은 1927년 2명의 교사가 주간 40여 명, 야간 1백 수십 명, 총 200여 명의 학생을 가르치는 거창의 대표적인 무산 아동 무상 교육 기관으로 성장했다. 1930년대 들어 보성 학교가 재정난을 겪게 되자 지역 유지들과 함께 보성 학원 유지회를 설립하여 보성 학교 운영을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대 말 “무산 아동의 자부(慈父)”라는 평을 들었다. 주남재는 또한 1920년대 후반 신간회 거창 지회의 주축 인물이었다. 1927년 10월 22일 신간회 거창 지회가 창립될 때 임시 의장이었고, 창립 후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좌우 합작, 민족 유일당 운동에 앞장섰다. 그 밖에도 1924년 거창 소작인 상조회 위원, 1927년 거창 노동조합 고문을 맡아 노동자·농민 운동을 지원하였고, 1926년 거창 형평 청년회 창립식에서 축사를 하였으며, 1928년 거창 농림 보습 학교 기성 준비회 조직 위원을 맡았다. 1928년 2월에는 거창에 주재하는 기자들로 거창 기자단을 조직하였다. 주남재는 일제 강점기 때 기독교 민족주의자로서는 드물게 거창 유지 반열에 올랐고, 해방 후 좌우익 양측으로부터 광범위한 신뢰와 지지를 받아 1945년 말 미군정이 실시한 거창 군수 선거에서 초대 민선 거창 군수로 선출되었다. 이후 좌우익의 대립이 심해지고 미군정이 좌익 세력을 본격적으로 탄압하면서 1946년 4월 미군정에 의해 거창 군수에서 파면되었다. 주남재는 1958년 10월 30일에 사망하였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