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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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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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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했는데, 3월 18일 예정된 졸업식도 못 치른 횡성보통학교 졸업생들도 합세했다. 그러나 일제의 사전조치로 천도교인 8명 포함, 12명이 검거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횡성천도교 대교구는 횡성청년회, 횡성감리교회와 협력해 치밀한 사전준비로 다음 만세운동에 대비했다. 3월 27일 만세운동에서 시위를 이끌었던 신재근, 안승훈, 강만형, 윤태환 등이 체포되어 일본헌병들에게 고문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군민들은 더욱 분개했다. 만세운동을 지휘했던 횡성천도교 최종하 대교구장 등은 첫번째 만세운동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더욱 치밀한 준비를 하고 다시 4월 1일 장날에 대규모 만세운동을 계홱했다. 4월 1일 역사적인 횡성군민만세운동이 시작됐다. 횡성 천도교 대교구에서는 감리교회와 연대하여 횡성읍으로 출입하는 도로에 교인들을 배치하고, 마을에서는 장꾼을 인솔했다. 오후 3시경 군중들은 1,300여명에 달했고, 상점들은 문을 닫았다. 마침내 만세소리가 터져 나오자 순식간에 장터는 만세소리로 뒤덮였고, 횡성천도교 대교구에는 태극기가 높이 솟았다. 군중들의 손에는 태극기가 몽둥이가 들려있었다. 장터의 술집에서도 서로 술을 권하며 만세시위 참여를 권했다. 이때 헌병분견소 소속 헌병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군중들이 헌병을 말에서 끌어내리고 뭇매를 가하자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총소리에 놀란 군중들이 잠시 주춤했으나 해산하지는 않고 날이 저문 후 다시 만세시위를 계속해 밤중까지 이어졌다. 시위대가 군청 뒤에 있는 헌병분견소로 향하자 헌병들의 총격이 거세졌다. 5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됐다. 군의회 위에 있는 느티나무 밑에는 총탄이 숨진 시체와 피투성이가 된 사람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날이 밝을 때까지 시위는 멈취지 않았다. 4월 2일 아침에도 200여명의 읍민들이 헌병분견소에 모여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체포자의 석방을 요구했다. 전날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다시 모여들었다. 4월 6일까지 횡성읍내의 상점들은 문을 닫았고, 7일에는 길가에 태극기와 함께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선전문을 게시하며 항쟁을 이어갔다. 4월 12일에는 서원면 분일리에서 송병기 등이 주도해 70여명의 주민들이 뒷산에 올라가 만세를 외쳤다. 이 소리를 들은 마을사람들이 합세해 수가 더해지고, 시위대는 산에서 내려와 마을을 돌며 새벽 1시까지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것이 횡성군민만세운동의 마지막 함성이었다. 4.1 횡성군민만세운동의 의미 횡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로부터 약탈과 노략질 등 심각한 피해를 입으면서 자연스럽게 항일민족정신의 싹을 틔웠다. 항일민족정신은 의병활동으로 시작해 구한말 일제강점기 격렬한 의병투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뿌리가 1919년 전국적으로 번지기 시작한 3.1 만세운동에 이어 4월 횡성군민만세운동으로 계승된 것이다. 4.1 횡성군민만세운동은 그 규모와 항쟁의 강도가 가장 격렬해 강원도 만세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로써 4.1 횡성군민만세운동은 횡성군민의 기개를 널리 덜치고, 애국의 고장 횡성의 가치를 드높인 상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