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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분노가 피운 위대한 애국심의 꽃이었으니 3.15 민주의거는 자유당 부정선거에서 비롯됐다. 이승만 독재정권은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를 부정선거로 준비해왔다. 치밀하게 준비된 부정 투표용지는 사전에 투표함을 채우고 유권자는 투표를 한 것으로 조작됐다. 많은 마산시민들이 투표소에서 '선거번호표'가 없어서 돌아서야만 했다. 그날 선거번호표를 잃어버린 마산시민들은 당시 오동동에 위치한 민주당 마산시당 앞으로 모여들었다. 국민의 주권인 '소중한 한 표'를 강탈당한 것에 항의했다. 그 정의가 마산 시민들에게 선거무효를 선언하게 하고 선거포기로 이어졌다. 그건 대한민국 최초의 '시민 불복종 운동'에 다름 아니었다. 마산합포구청은 당시 마산시청으로 선거 개표소가 있던 자리였다. 시청 앞의 큰 도로(현 3.15대로)가 마산시민에겐 생과 사의 전선이었다. 경찰은 항의하는 시민들에게 실탄 사격을 가했다. 그렇게 3월 15일의 밤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앞엔 마산의 학생들이 서 있었다. '경찰이 학생을 쏘아 죽였다.'는 단말마의 고통같은 전언은 순식간에 마산을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물들였다. 골목에서 거리에서 자유와 정의의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마산시청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밤이 깊어지자 1만여 명이 넘는 시민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마산시청 앞으로 강물처럼 여흘 흘러와 정의의 바다를 이루었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은 이들을 폭도로 규정했다. 실탄사격은 계속됐다. 그 거리에 학생과 시민의 시신이 뒹굴었다. 그날 밤사이 모두9명의 학생과 시민이 희생되었다. 의로운 주검들은 동료학생들에 의해, 시민들에 의해 경상남도립마산병원(현 마산의료원)으로 옮겨졌다. 묻는다. 이들이 폭도였나.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건 분노에서 나온 애국심이었다. 1960년 3월 15일, 마산이 보여준 거룩한 애국심의 꽃이었다. 여기 이 거리 위에서 뜨겁고 붉게 피어난. 2020년 11월 일 3.15 민주의거 예순 해를 맞아 (사)3.15의거기념사업회에서 짓고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