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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 유연복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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碑陰記(비음기) 여항산 기슭에 우뚝히 서 있는 것은 고인이 된 내 친구 이기석 군이 형을 따라 죽은 의로운 사적을 새긴 비석이다. 군이 세상을 뜬지 3년 되던 해 같은 마을의 강봉흠 김보현 권영가 김장수 박한현 등 여러분들이 고을의 인사들과 더불어 탄식하면서 서로 고하기를 성보(性甫,기석의 字)의 죽음은 난리에 죽은 것이 아니고 의리를 위해서 죽은 것이다. 이같은 뛰어난 행실이 인멸되어 칭송되지 않는다면 性甫(성보)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계가 없겠지만 세상을 교화하는 일을 어찌하겠는가 라고 했다. 이에 말이 모아지고 의논이 일치가 되어 장차 비석을 세워 그 사적을 새기고자 했다. 아아 의리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이 정말 이러하구나 군의 본관은 성주인데 문렬공 조년의 후손이다. 십대조인 일장이 벼슬을 버리고 바닷가에 숨어 살았는데 그 자손들이 시와 예로 업을 삼았다. 부친은 정현이고 모친은 창원 황씨이다. 형제는 다섯 사람인데 형님 기수는 온화하며 고상하였고 또 문필이 있어 고을에서 추앙을 받았다. 기상 기우 기필은 그 세 아우다. 군은 어려서 가난하여 해가 뜨면 농사 짓고 해가 지면 글 읽었다. 힘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기니 사람들이 그 효성을 칭송하였다. 형제간에 우애 있었고 자식을 올바른 방향으로 가르쳤다. 아들 명순 태순 진순 등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 집안의 명망을 잘 이었다. 지난 경인년(1950) 큰 난리에 함안과 진해 일대는 전쟁터로 변하여 주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숨었다. ○은 해사정에서 형님이 중도에서 난을 당한 것을 문득 바라보고서는 급히 달려가려고 했다. 며느리 이씨가 옷자락을 끌어당기고서 울면서 말렸더니 노하여 꾸짖으며 말하기를 형님이 난을 만난 것을 보고서 동생이 태연히 앉아있을 수 잇겠느냐 하고는 드디어 포탄을 무릅쓰고 곧장 달려갔으나 반도 못가서 포탄에 맞아 운명하였으니 바로 경인년 6월 26일이었다. 슬프다. 죽고 장사 지내는 두려운 일에는 형제만을 크게 생각하게 되며 들판과 진펄에 시체가 쌓여 있더라도 형제는 가서 구해낸다네 라고 詩經(시경) 常棣(상태) 시에서 읊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사람을 막 죽이는 곳은 죽어 장례 지내거나 들판 진펄 같은 것에 견줄 바가 아닌데도 의리와 목숨 가운데서 무엇을 취할 것인가를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곧바로 판단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난을 급히 구하려고 한 사람이 일찌기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아아 장차 누가 이군만큼 될 수 있단 말인가. 임진 1952년 하지에 안동 권오봉은 적는다. 임진 1990년 윤 5월 중순에 국립대학교 한문학 교수 허권수 역 중국문학 교수 정헌철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