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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효근(張孝根)은 서울 출신으로 이종일(李鍾一)·오세창(吳世昌) 등 몇 사람과 같이 「제국신문(帝國新聞)」·「대한민보(大韓民報)」를 창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만세보(萬歲報)」를 발간하여 배일사상의 고취와 일진회의 반민족적 행위를 비판하였다. 그는 1898년(광무 2)에 이종일·심상익(沈相翊)·염중모(廉仲模) 등과 함께 제국신문을 창간하여 중류이하의 민중과 부녀자를 대상으로 자주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폐간될 때까지 언론계에서 활약하였다. 그리고 1906년(광무 10)부터 1907년(융희 1)까지는 천도교주 손병희(孫秉熙)의 제창으로 만세보를 창간하고, 당시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반민족적 행위를 맹렬히 비판하는 등 민족사상 고취에 진력하였다. 1909년(융희 3)부터 1910년까지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후신인 대한협회(大韓協會)를 배경으로, 오세창·최영직(崔榮稷)·심부성(沈富性) 등과 같이 대한민보를 창간하여, 오세창은 사장, 그는 발행인 겸 편집인이 되어 일제 통감정치의 비판, 일인(日人)들의 난무한 행동을 풍자·경고하는 등 필봉을 통한 배일사상 고취에 진력하다가, 일제에 의하여 폐간되었다. 1919년 2월 27일에는 천도교 산하 보성사(普成社) 총무로 있으면서, 3·1독립선언서 21,000매를 인쇄하여 배포한 혐의로 3월 1일 체포되어,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5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2년 2월 6일 제2의 3·1운동을 계획하여 주도하였으나, 일본경찰에게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25년 이후 경기도 고양(高陽)으로 내려와 독립의 일념으로 일기와 시로 마음을 달래면서 여생을 보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