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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될 것이다. 일본은 독도에 대해 주인이 없는무주지 섬임을확덴하는절차를 밟지 않았다. 영토편입 사실을 관련국인 한국에 통보하지도 않았고, 정부의 관 보나 일본 전국에 배포되는 신문에 공고하지도 않았다. 이 사실을 대한제국 정 부에 알려온 것은 만 1년 1개월이 지난 1906년 3월 28일로서, 그것도 시미-네현 의 오키섬 관리들이 독도를 시찰하고울릉도에 들러 울릉군수심꽁택에게 독도 를 일본의 영토로편입했음을구두로통보했다. 그러나이때한국은 넉 달전을 사늑약으로 외교권찰 빼앗긴 상태였고, 일본 통감부 간섭 하에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의 제기를 할 수 없는 때였다. 일본의 독도 침탈은 한국에 대한주권침탈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일본은 해방후에도6 . 25전쟁 와중에 독도불법 점거를기도했으며. 현재까지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한다. 한국인에게는 독도 침탈로 시작된 한국 강점의 이픈 상처가 독도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되살아난다 을샤조약반대운동 상소운동 을사조약 강제 소식이 알려지자 의정부참정 이상설李相테은 11월 19일 조약 파기와매국노처단윷요구하는상소를올렸다. 박제빈朴齊행 • 아유승李格承 • 정명섭T明燮 • 조세딴117따煥 • 고익상핍翊相 • 김종호金웰헬 • 윤태영尹짧榮 퉁도 조약반대 상소운동을- 이었다. 경상북도 칠곡滾·의 강원형은 13도유생들과 연 명으로상소를올려 「을사조약」의 파기와을사5적의 처단을요구하며,국권회 복을 위해 궐기를 호소하였다. 항일논설및보도 황성신문사사장짱지연폈志淵은 11월 20일자 『황성신문皇城新쩨』에 「이날을 목놓아통곡한다끓日 tl!1tc쨌大哭」라는논설을발표, 일제의 을사조약강압의 침 략성을 규탄하고 조약에 조인한 매국대신들을 통렬히 비판하였1斗 이로 인해 제2편 | 국권회복운동 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