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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의봉기 그해 12월한달사이에 고부군수가다섯번이나바뀌는발령닫에조병갑이 다시 유임되자 1894년 1월 10일 밤 전봉준이 앞장선 농민군이 고부군 청사인 관아 官衝를 습격했다 . 조병갑은 밤을 타서 전주감영全州앓쓸 으로 옴을 피했다. 농민들은관아를점령해억울한죄인을석방하고군기고의총기로무장을갖추 었다 . 날이 밝자농민들은새로쌓은보를허물고,보세로거두아 창고에 쌓아 놓은 콕식을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민란을진정시키기위해장흥부사이용태가안핵사로파견되었다. 이용태는 해산한동학교도들을-닥치는대로체포투옥하고집에불을질렀으며,처자들 을겁탈하는퉁갖은만행을저질렀다. 이에전봉준은각지통학접주에게통문 을 보내 3월 21일 교주 최시형의 탄생일을 기해 백산에 집결할 것을 호소하였 다. 백산에 1만 명이 넘는 동학농민군이 집결했다. 4월 4일 동학한민군은 부안 을 점령하고, 정읍 황토현에서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의 군대를 격파하여 정 읍 • 흥덕 • 고창과 푸장까지 전라도 중서부 지 역과 4월 12일에서 4월 17일 사 이에 영광 · 함평 · 뚜안일대 퉁전라도남서부지역을손에 넣은후4월 27일 전 주성을점령하였다. 다급해진 정부에서는 청나라에 원병을요청했다. 청국군이 조선에 파병되자 일본은 참모본부 내에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하고 ‘일본공사관및 거류민을보호 한다.’라는 구실로 제5사단 혼성여단 선발대 파견을 시작으로 “월 하순까지 8,000여 명의 일본군이 서울과 인천 사이에 집결하였다. 청일전쟁의발발 청국과 일본이 동시에 파병하여 충돌가능성이 높아지자조선정부는 당황했 다. 조선정부는 전봉푼이 제출한폐정개혁뺑政改짧 27조항을 받아뜰이고 개혁을 약속했다. 동학농민군도조선왕조를무너뜨리고자한것은 아니었쓰므로정부의 제1 편 | 국제정세의 변화와 조선의 위기 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