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page

김시-용金時容 훈격 애국장(1995) (양)1906. 2. 4.∼(양)1945. 7. 23 ‘ 제주i맴州 조천 품신으로 독립운동 당시 고양군 둑도변 둑도리 321에 주소를 두고 있었다. 1928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積田大쩔에 재학중 재앨조선청년동맹在 日朝姓좁年同盟에 가입하여 활통하였다. 그는 1929년에 재일조선청년통맹 기관 지 「조선청년朝縣줌年」 에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치안유지법’을 논박하는 기사 를 게재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하다가 1929년 8월 18일 동경구재판소束京뭔就 '.fiJ所에서 소위 신푼지법 위반으로벌금 100원을받았다. 그후뱅을 얻어 귀국한 그는 1931년 5월겪 부산에서 조선방적 외 수개 공장의 총파업쓸 지도하면서 노 동운동을 전개하였고, 부산 노동조합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1931 년 11월 1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징 역 2 년을받아옥고를치렀다. 출옥후고향인제주 조천朝天으로귀횡t하여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항거하면서 소비조합消때合 활성호}를 위해 힘을 쏟았다. 1937 년 8월에그는제주도농민조합운동을전개하다가옥중순국한부생종夫生鍾의 공적을기리며 비문을작성하는동추모비문건립에 앞장섰다 이와함께 조천 공립소학교의 학생 70여 명에 대한 의식계몽 강습회를 계획하는 퉁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다. 또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의 대륙침략에 반대하여 주위의사람들에게각종부담금과군수물자공출에 대하여 불납할것을주장하 면서 반전운통反戰述떼j을 전개하였다. 1938년 9월에는 경방단훌防團 조직에 반 대하면서 청소년뜰을 대상으로 거부운동을 펴기도 했다. 또한 1938년 10월 중 일전쟁의 전황에 대하여 현재 일본군에 유리한 것처럼 선전되고 있었으나, 중 국군의 유격전과 장기전 전술에 따라 전황은 장기전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면 서, 이러한사실을 일반에게 알리는등항일의식을고취하였다-. 이후에도계속 하여 중일전쟁에서 결국 일본군이 패퇴할 것이라는 내용의 주장을 선전하면서 독립의식을고취시켜 갔다. 그런데 이러한사실이 일경에 발파됨으로써 피체 되어 1942년 8월 1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딴으로 징역 3년, 462 고양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