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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시작했다. 이후 이듬해 적멸굴寂滅짧 49일 기도, 울산 집에서의 공덕닦기, 1859년 10월부터는 경주 구미산용담정에서 수도를하였다. 이러한수도끝 에 1860년 4월 5일 짜늘의 음성을 듣고 동학이라는 새 종교를 창도하였다고 한다. 1861년부터 최제우는 자신의 깨달음을 13자로 된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待天主造化定 永世 不忘萬事知’라는주문에 담아전파했다. 그는배우지 못한서민들도입도할수있고입도한그날부터 군 자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민중들은 무엇보다도 최제우영정 사람이 하늘(A是天 또는 A乃天)이라는 가르침에 열광하 며 너도나도 동학에 입 도했다 동학의 교쩨가날로커지자조정에서는동학포교를금지시키고, 1864 년 3월 10일 교조최제우를그릇된가르침으로세상을 어지럽힌뎌는‘사도난정 쩌道없L政’이란죄목으로처형했다. 제2대 교주 최시행(1827∼1898)은 체포를 피하여 강원도와 경확 해안지대 또 는산간지대에 은거하면서 동학교도들을조직화하였으며, 교리연구와 경전간 행을 계속하여 교세가 비약적으로 커졌다. 민생의 파탄과 만주- - 연해주로의 이주 1863년북한지방에 가뭄이 휩쓸자함경도지방민들이 집단적으로 연해주로 이주를시작하였다. 1867∼1869년 사이에 두만강건너편 연해주의 티진해, 안 치혜, 시지미라는곳에 3개 마을을형성한이주민수는 1,800명에 달했다. 1869 년 대기근 때는 11∼12월 사이에 4,500명이 건너갔다. 1870년대께도 한인들의 이주는계속 이어져 수이푼,슈판, 레푸강가와수찬계곡동지에 정착하였으며, 남부 연해주지역에 시닐리코프, 코르사코프, 푸틸로프카, 크로우노프카 퉁지 에도 한인촌락들이 계속 생겨났다. 대체로 시베리아 철도가 개똥되던 1900년 제1면 I 국제정세의 변화와 조선의 위기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