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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선의금호문의거 송학선宋핑뺨은 1897년 서울 천연동에서 출생하여 자랐으나, 1922년 25세 때 고양군 연희면 북 아현리로 이사하였다 . 어려서부터 성품이 파묵하여 일생을 두고남과언쟁을벌이는일이 없었다 또늘집에조용히 있으면서 청결한것을 좋아하는단아한성격의 인물이었다. 그의 가정은너무나가난하였다. 서대문공립보통학교에 입딱은했으나13세 때 아버지 사업이 고낸히는바람에 가정이 더욱궁색해져 7팩이 뿔뿔이 흩어 져야했다. 송학선은다니던학교도 1년만에그만두어야했다. 17세가될 때까 지 4년 동안이나기족들은 한 지붕 아래 모여 살지 못하였다. 1910년 경에 가족들은 다시 서울 천연동집에 다시 모여 살게 되었다. 1916년 23살 되던 해에 송학선은 경성부 북미창정北米융뻐T 106번지 농구상農具햄에 인 부로고용되어 직업을갖게 되었다. 생활의 안정을 얻었으나그간에 못먹고방 랑한뒤끝인지라티아민(비타민 Bl) 부족으로생기는영양실조증세중한가지 인각기병에걸려 항상다리가부어 있고팔다리에 힘이 없으며늘피곤하였다 송학선 초상화 려 ιl아화가 새르새 이 예브시1니에표 -』이}|」E τ힘 병으로 인해 감각이 무디어 지는증세 때문에 일하는 데 지장을 가져오게 되어 6년 뒤인 1922년 해고되고 말았다. 그후송학선은 일정한직업 없이 날품팔이를 하여 겨우 살고 있었다. 그해 즈음에 그의 집은 천연 동에서 고양군 연희면 아현북리로 이사하였다. 1926 년 3월 그는 일을 나갔던 남대문통 3정목 경성사진관 에서 가옥수리를할 때그집 부엌에서 서양칼이 떨 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가지고 돌아와 예리하게 갈 아서감추어두었다. 1926년 4월 26일에 융희황제가 송하하자 조의를 표하기 위해 창덕궁에 갔다. 그 이튿날인 4월 27일에 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7 • 의 열투쟁사, 1976, 352∼356쪽 374 고양 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