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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의자를들어 재판장모리伊森에게 달겨들어 큰소리로“일본판반드시 밍하 고 내 조국조선은 꼭 독립이 된다. ‘’라 고 외쳤다 간수들에게 제치를 받으면서 김익상 의시는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감옥으로끌려갔다. 1939년 여름, 남화한인청년연맹의 흑색공포단원으로서 백정기 의사와 함께 주중일본공사아리요시有놈明를처단하려다체포된이강훈은김익상과같은나 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감옥생활을하고 있었다. 이강 훈은 당시 나가사키감옥에서만5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죄수들에게 일 을 시키는감옥안의 비단짜는공장에서 우연히 김익상을 만났다. 나는 철창 생활 7년째였고, 그는 이미 옥고 17년을 경과했었따‘ 당시 사 진에서 보았던 씩씩한 모습을 연상하게 하여주는 그의 창백한 얼굴, 훌떡 벗어진 머리, 쭉째진 봉의 눈은정춘의 대부분인 근 20년이란세월을적의 영어固圖에서 보낸 그였지만 어딘가 아직도 적을 집어 삼커는 듯한 기백이 장기간 옥고에 시달려 온 그의 모습 중에 스며 있는 것이 엿보였다 나는 1940년 구마모또熊本 감옥으로 이감될 때까지 옥리의 눈치를 보야가며 그 와이 이야기 저 이야기 못할말이 없이 다하면서 서로격려하고달래면서 시일을보냈다 김익상은 여러 번 감형을 받아21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그를 여전히 위 험한 ‘불령선인’으로 분류하고 있던 일본 형사에게 암살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김익상의 오발로 아내를 잃은 영국인 톰슨은 김익상이 죠국 독립을 위 해서 다나까대장을저격하다가자기 아내를오살誤殺한사정을돼늦게 알고그 의 애국적 의거에 깊이 감동하여 일제 사법 당국에 관대히 처분해 줄 것을 간곡 히 진정했다고 한다. 또 당시 임시정부 외무총장外移總長 조용素돼은 일제 외무 대신 우찌다內田康값에게 항의문을 발송하고 김익상의 사형 판결이 부당함을 역설하고설사김익상을사형에 처하더라도이후에 무수한김익상이 나타날것 이라고 경고하였다_2) 제4편 I 3 · 1운동 이후의 국내외 독립운동 3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