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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로온다는 정보를 듣고 김익상 • 오성륜 吳成쁨 • 이종암섣짧岩 3인으로하 여 금상하이의 황포탄부두에서 폭사의거를감행하였다 . 그러나폭탄은 불발했 고 총알은 다나키- 를 명중시키지 못한 채 김익상과 오성륜이 체포되고 말았다. 1922년 여름, 의열단은 일제기관에 대한 폭탄거사 를 계획하고 김상옥을 파 견하였다 . 김상옥은 1922년 11월에 서울로 잠입해 들어왔다. 집상옥의사는 일 체의 추격을 피해 은신하였다 . 그러나 1923년 1월 12일 독립운동 탄압의 상징 인 종로경찰 서에폭틴 을던지고경기도경찰부는김상옥의은신처를찾 아내습 격하였다. 이에 김상욱은 단신으로 경찰병력과 총격전을 벌이다 장렬한 최후 -맞았으며,다른관련지는전원피검되었다.이와같은의열딴활동은식민지 청년들의 가슴을 고동치게 하였다 . 1923년 의열단 단원 숫자가 약 150명에 이 르정도로청넌들이 적극참여하였다. 한편의열단은중국본토와만주, 국내, 일본, 극동러시아 각처에 거점을 확보하고, 대만 · 몽고로까지 활동반경을 넓 혀갔다. 1923년 9월 1일에 일본 도쿄와 인근 지역에서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여 민심 이 흉흉하자한인들이 폭동 을일으켰다 는유언비어를 퍼뜨려 일본국민의 공포 와두려움의 화살을 한인들에게 돌리케 하여 5천여 명의 무고한 한인들이 이른 바자경단白얄團을조직한일본인들에게 무참히 학살딩하였다. 관동대지진이 있 은 후 일본에서는 아나키스트 박열이 일본 천왕과고관들을 처단하려다발각되 었고, 김지섭의 도쿄 일본궁성 니주바시=파샘투탄의거 퉁이 이어졌다. 1925년 경에 들면서 의열단의 암살파괴운동은 일제의 정보력과 수사망 앞에서 한계를 느끼고노농 대중의 조직화에 기반한무력투쟁 쪽으로방헝=을 전환하게 되었다. 김익상의거 1921년 9월 12띨 서울 남산 왜성대@城쌓· 조선총독부 청사외 비서과秘밀;課와 회계과장실용하끊흉초에서 굉음을 내며 폭탄이 터졌다 . 이 건물-은 1926년 경복 궁 내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세우기 전의 총독 부 청사였다. 폭탄 은 두 발이 던져 370 고양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