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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하였다. 그러나융희황제의 승하로메이데이 기념행사가금지되자 천도교와 연대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상하이에서 「복상服喪 통콕하는 민중에 격廠함」이란격문 5천여 장을 인쇄하여 비밀리에 서불로보냈으나 이 격문은 6월 6일 서울에서 압수되었고 만세시위운동 계획은 발각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공산청년회와 천도교 간부 둥 1백 수십명이 체포되었다- 천도교와조선공산당측의 제획이 발각되자,조선공산당및 고려공산청년회 와 연결된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독자적으로 태극기와 .조선똑립만세‘라고 쓴 깃발 30장, 격문 1만여 장을 인쇄하여 6월 9일부터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이들 은사전 연락을 취하는과정에서 고둥보통학교 몇 학생들로구성된 세칭 ‘통동 계팩洞系‘2-1)와연결되었다 서울의각학교학생들로서통지를규합한통동계는 격문 5천여 장 인쇄하여 시내 각 학교와 전국 주요 지방학교에 배포하였다 3 . 1운동을경험한일제는3 · 1운동 떼와같은전국적 · 전국민적 만세시위 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6월 10일 시위 움직임을 감 지한 일제는 약 1만 명의 일본군과 각도에서 3천 5백 명의 경찰을 차출하여 사 상단체 · 종교단체 · 학교 둥을 대대적으로 검속하고, 검문검색과 경계를 강화 했다. 국장 행렬이 지니는 거리에는 기마경찰 • 헌병 · 정사복 경관 퉁이 총검 으로무장하고요소요소에 배치되었다. 장례행렬이 지나가는 길 양쪽에는 2만 1천여 명의 학생둡이 도열했는데, 일제는교사의 책임 아래 학생대열을 해산하 도록사전조치했다. 1926년 6월 10일 오전 8시 장례행렬은 창덕궁에서 발인하여, 종로3가 - 청 제3가-을지로3가-을지로 6가-훈련원(영결식; 오전 11시) - 동대문- 창신통 -신설동-청량리 -금곡의유릉金.格l 俊에도착할예정이었다. 6월 10일 오전 8시 반 종로3기-의 만세시위를 신호탄으로하여 학생들의 시위 는8곳에서 일어났다. 학생들은가슴에 간직한태극기를꺼내 흔들면서 준비해 온격문을군중을호 E해뿌리고 ‘대한독립만세‘를외쳤다.을지뚱부근에서일어 24) 6 . 10만세사건을 준비한 중퉁화교 학생 중심의 조직 중앙고보와 중등학교 학생들이 중심 이 되어 통동 i빼려의 김재문하숙방에서 격문을 준비했다 36。 고양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