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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사에서 발행한 여성잡지 신여성 1931. l원호 성운동은 1898년서울북촌北村의 양반부녀들 중심으로 조직된 찬양회에서 시작되었다. 찬 양회에서는 순성여학교順成女學校를 설립, 운 영했으며, 회원들은 만민공동회에도 침여하였 다. 그해 10월 찬양회에서는관립여학교설립을 요청하는상소를올려 황제의 승낙을 받았으나, 재정 부족으로 무산되고 순성여학교도 경영난 으로문을 닫았다. 1907년 결성된 진명부인회進明婚A會는 신생 활운동을 전개했으며, 그해 2월 전국적으로 일 어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남성과 동퉁하 게 구국운동에 참여할 것을 부르짖으며 민족의 식을뚜렷하게 나타내었다. 여성들은자신의 반 지를국채보상운꽁에 헌납히는퉁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3년에 여교사 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송죽회松竹會는 비밀리에 독립운동자담을 모금하는 동 1919년까지 활동이 이어졌다. 3 · 1운동은 여성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다. 여성들도 시위운동에 참여했으 며, 당당한 민족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그 후 대한민국애국부민회와 상해한인 애국부인회와같은여성단체가조직되어옥중동지를돕고상해임시정부에자 금을 모아보내는 퉁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1920, 1930년대에 사회주의자들과 신여성‘들, 기독교계 여성들사이에서 전 근대적인 인습으로부터의 여성해방과 근대적인 여권향상을 푸르짖었지만, 낭 만적인절규로치부되었고, 여성의사회적 지위를확립하는데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신식여성들중에서 ‘자유연애’를주창하고 실천한 에도 있으나, 사회 적으로용납되지 못하고 대부분 불행하게 일생을 마쳤다. 한편, 1923년의 물산장려운동에서는부인들이 .토산애용부씬회‘를발기하는 퉁부인들의 호응 속에서 다소의 효과를 거두었다. 이 운동은 기생들에게까지 번져, 이들은 비단옷을 벗어버리고 면제의복해웠衣服을 입고 접객석에 나오기 332 고양 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