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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학교 시옥숭앙중고둥학교 전신 로대학을설립하그l자했으나총독 부에서 민립대학기섣회를 끝내 인 가하지 않고 이 돈은총독부가치-지 하였다 . 3 . 1운동 이후 다시 민립 대학설립운동이 일아나전국에 민 립대학기성회 지방부가 조직되었 으며 만주와하와이 퉁동포사회에 까지 모금운동이 전개되었다. 일제 는유지 및 면장, 군수둥관료들에 게 압박을가하고위협하여 이들이 대학설립운동에 참여함을 방 해하 였다. 그리하여 모금-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채 지지부진해짐으보써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실패로돌아갔다. 1921년 설립된 조선어연구회는 한글강습회와 강연회, 잡지 발간 동을 통하 여 우리말과글을보존시키고발전시키고자하였다. 조선일보사에서는 1926년 부터 ‘아는것이 힘, 배워야산다’리는표어 아래 여름방학에 귀향8-l는학생들을 통원하여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다 . 동아일보에서도 조선어학회와 함 께 1931년부터 「브 · 냐로드운통」을 주도하여 문맹퇴치운동을 하았다. 1906년 8월에 이상설이 북간도용정에 설립한 「서전서숙」은 꼭외 민족교육 학교의 효시가 되었다. 북간도 화룡현에서 명동촌을 개척한 김약연은 1908년 명동학교를 세우고, 1910년 명동중학교와 1911년 명동여학교를 병설하여 많은 독립군과 독립지사를 길러내었다. 국외 무관학교 설립운동은 독립군지기건설 운동과 연관하에 추진되었다. 1911년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신홍강습소가 세워졌다. 이후신홍강습소는합니하哈펌河로옮겨 신흥학교로, 3 · 1운통후지 원자가크게 증가하여 1919년 5월에 신흥무관학교로확대하게 되었다 . 한편 미 주국민회는중국과 러시아의 접경지역인 목릉현 밀산부봉밀산에 미개간지 10 만평을 사들여 한홍동웰興페이라는 한인촌을 개척하고 이곳에 숭;무학교뿔武댈 校를 설립하여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지114편 I 3 · 1운동 이후의 국내외 독립운동 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