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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대한매일신보 』(1904. 7.18)는 이들보다늦게 창간되었다. 이들 민족언론은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특히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과 애국계몽운동 의 실질적인 중심기관이 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소유주가 영국인 베텔 Bethell. E.T. (裵說)로 되어 있어 외국인 소유로분류되어 검열을 받지 않았기 때 문에 우국적인논설보써항일정신을고취하였고항일비밀결사신민회의본거 지가되었다. 일본은 한국 언론에 대해 외교경로를 통해 여러 차례 항의하며 언론통제를 강요해 왔으며,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군사기밀 보호’를 이유 로 일본 헌병사령부까 직접 검열을 실시하여 『제국신문 』이 정간 처분되기도 하였다. 검열당한 언론사는활자를 뒤집어 이른바 벽돌신문’ 기사를내 보내 항 의하였다. 8) 1907년 7월 24일 씨완용 내각은 「신문지법」을 1909년 2월 23일에는 「출판 법」을공포하여 내국인 언론뿐아니라 『대한매일신보』 같은외국인소유 언론 도 검열을 받도록 탄압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의 한국병합 후 민족언론은 모 두 폐간딩L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조선총독부가 인수하여 ‘대한’을 떼고 총 독부기관지 『매일신보』로만들었다. 3 · 1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10년간 은 한국 언론사의 암혹기였다. 3 · 1운동이 일어나자국내에서는 「조선독립신문」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지 하신문이 나왔다. 상하이에서는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이 발행되었다. 1920년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시대일보』가칭칸되어 총똑부의 빈번한 압수와정간, 때로는 언론인들이 투옥당하면서 발행했다. 1920년대 초반에눈 언론단체 무명회無名會와 철필구락부짧짧f具쌓部가 결성되 어 언론집회압박탄핵회, 전조선기자대회 동을 개최하고 공동으로 항일운동을 펼쳤다. 사장적으로는 민족주의 • 사회주의 • 무정부주의 퉁이 항일 공동전선 8) 벽돌신문이란검열당하여 삭제된 기사부분을 활자를 뒤집어 까망게 나오게 인쇄한부분이 있는지면을밀한다, 제4편 I 3 · 1운동 이후의 국내외 독립운동 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