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page

1936. 4. 1 1949. 8. 15 1973. 7. 1 부령제8호 12변 중 용강· 연희 • 한지 3 개 1 12변에서 9면으로 축 소 ( 1936. 2. 24. 공포) 변 경성부로 편입 「--------- -------- ------- ‘ 9면에서 6면으로 축소 법률 제159호와 9면 중 은평 · 숭인 • 둑도(묵섭) | / | (원당 , 벽제, 신도, 지도 , 제160호 의 3 개면 서울특별시로 편입 | L송포, 증면남음) 6면 중 신도면 • 구파발리 • 진관 | 법률제25%호 「현재 5면 내 • 외리 서울특별시로 편입 ’ 일제하에서 1914년에 서울의 동서지역 6개 변을 고양으로 편입시켰다가 1936년에 용강, 연희, 한지면 세 개면이 도로 서울로 편입되었으며, 해방 후인 1949년 은평, 숭인, 둑도했파 3 개 면이, 1973년에는 은평구의 일부인 구파발리 와진관내 · 외리가다시 서울로편입되었다. 지역독립운동사에서의병운동, 애국계몽운동, 국채보상운똥을거쳐 3 · 1운 동에 이르는 동안 지역 공동체의식, 거주민의 동질성 의식이 구국운동에 상당 한작용을 한것으로보인다 . 혼히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그들의 토지 소유 가많아착취가심했던곳에서 민족적저항도컸을것으로생.Zr해온경향이 있 었다. 그러나일제의 식민植民으로인해 지역공동체 내의 동질성이 많이 깨어진 지역의 경우 강력한 저항운동을 이루어 내지 못하는사례들이 많다 . 일본인들 의 거주나토지소유가거의 없는지역에서 오히려 대규모의 장력한저항이 일 어난경우를볼수있다. 이런점에서고양지역에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어느 정도거주했는가하는것과이지역독립운동의양상과의상관관계를연관지어 볼필요가있다. 고양군의 외국인 거주 현황에 대해서는 『고양시사 』 1(2005)흡 참고하여 서술 하면, 고양군에는 적지 않은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뚱 일본인이 대부 분 을 차지하고있었으며, 그외에중국인과서구인들이 있었다. 먼저 고양군에 거주히는 일본인은 1911년과 1912년에 각각70명, 99명이었던 것이, 1914년 이 후에는급격하게 증가하여 1917년에는 1,633명에 달하였다. 1914년 이후 일본 인의증가는경성부에서고양군에편입된지역에있었던일본인으로보아야할 것이다. 3。 고양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