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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의 활동을 할 계획을 세웠다. 이탁과 27인 결사대는 1919년 3월 3일 광무황제 국장 반우·) 행렬이 통과하 는 망우리괴 H에서 매복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매국 역적들의 거리가 융희황제修뺀皇帝(순종)의 어가뼈|쩌와 너무 가까워 만일 잘못했다가는 황제의 운 구에 해를끼쳐 역적들을죽이려다가도리어 역적이 되겠디는생각에서 주저하 며 계속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나끝내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광무황제의 독살 의 진상과 역적들의 죄악상을폭로한성토문聲討文만을황제의 가마안에 투입 히는데그쳤다. 27인 결사대는 3월 20일경 독립문에 그려진 퇴색된 태극기에 다시 색을 칠하 고 성토문과 경고문 · 격문뻐文 둥을 독립문과 종각웰뻐 l 기타 여러 곳에 붙이고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남만 주로 무사히 귀환하였다. 이탁도 영남지방으로 피 신했다가 5월 말껑에 남만주로 귀환했다. 위의 체포된 대원들 씌 재판은 1920년 8월 25일에 예심을 종결하고, 1921년 1월 19일 경성지방병원京城뼈}j法院 최종 파결공판에서 징역형이 언도되었다 . 남만 주로무 사히 귀환한 이탁은유하현에서 돌아온 결사대원들을 다시 규합 하여 항일전을 계속하다가 한족회韓族셈 간부에 선임되었다. 또, 동년 5월 임시 정부 만주 특파원澈뻐特派잉으로 임명되어 서로군정서西路파政뽑 조직에 참여하 고그간부에도선임되었다 이탁은그후에도구국모험단간부기-되어폭탄제조기술자양성과폭탄제 조에 주력했다. 1920년 1월에 광복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피입되어 무장 항일 투쟁을 전개하다가 동년 2월에 재만독립 단체를 통합 단일화하여 대한광복군 총영太합'Jt復llI總살을 설치하였다. 한편 대한청년단연합회 교육부장에 취임하 여 총재 안병찬 • 부총재 김찬성金燦쿄 · 재무부장 김시점깜11t빼 • 교제부장 김 T만金斗파 퉁과 합께 활동했다 . 1920년4 월에이탁은김승학 • 안병찬과함께서간도 西問싸각단체통합조직인 대한광복군총영 조직개편을 보고하기 위해 임시정부가 있는상하이에 도칙하였 3) 시신을배장하고나서 제작한우주/,\!;I;를집으로다시 가지고오는의식. 304 고양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