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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인 걸사대를 이끔 이탁 이 외에도 이우영李宇榮 • 띠기원李뀔없 등이 추후에 가입하여 단원은 27명보다더 있었다. 이탁은 평남 평원平原군 출신으로 성천에 서 성장하였다. 그는 평남 성천 • 개천 • 강 동 세 고을에 걸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자 산가였다.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가서 독립운동의 길을 찾았다. 그는 남만주의 집안 • 통화 • 유하현 등지를 돌아보았고, 유하현 삼원포에 독립운 동의 기지로서 경학사를 세겨운 이회영 · 이상 룡 · 이시영 · 이동녕둥과템을 합쳐독립군 양성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請習所를 설립한 다음, 1911년에 성천으로 돌아오} 서소유농토를방매하고재산을정리하여독립운동기금을순비했다‘ 그는서간도에서 독립군 10만명을양성할목표를세우고병사들과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평남용깅군사람차병수와손잡고활통했다. 그꾀나일경이 눈치 채고 체포령을 내리자 이탁은 통생 이석李錫(본명 예용l참짧)을 데리고 그 해 음 력 5월 6일 유하현으로 다시 돌아가고향에서 가산을 정리하엑 가지고 온 자금 으로 유하현 제1꾸 야저구딴總熾에 농토를사서 개간사업을 시작했다. 그 수입 금을 갖고 운동자금에 투입하였다 이탁은 1913년 9월 가족들을 전부 만주 유하현 대사탄大沙懶으로 이주시키고 유하현 일신학교장日新핑校長이 되어 학교를 운영했다. 1914년 들어 서리가 일 찍 내려 흉작으로 동포들이 큰고통을 받자 미주 동포들로부터 구호금을 받아 동포들을 구제했는데, 학교 또한 운영난에 부딪히자 교육회를 조직하여 한 집 당3각角씩 후원담을 거두어 학교를운영하고, 교사들을 도왔다 1917년 5월 25일 의병장 이진룡李鎭龍이 관전현뿔셈]쐐에서 일경에게 체포되 어 부대가 해산하게 되자, 이탁은 그 부대원 1천여 명을 재규웹하고, 연해주로 2) 이탁조條, 대한민국 공훈사발간위원회, 『대한민국 독립운동 공훈사』, 1983. 3。2 고양 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