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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망명하여 1914년 12월 이동휘와 함께 길림성 동녕현束 辦 1내자구羅子游에 통림무관학교束林武官學校를 설립하고 교관으로 재직하면서 독랩군 양성에 힘 썼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성립되자 임시의정원의 경기도 지역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9월 20일 임시정부의 국무원 비서장에 임명되어 1921년 2 월 24일까지 국무총리 이동휘를보좌했다. 1923년 10월에는상째 거주 한인독 립운동가들이 조직한대한교민단의 의원으로서 교민사회의 발천을위하여 활 동했다.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 30일부터 개최되었을 때, 오영선은 헌법기 초위원짧法起草委員으로 선출되어 기초위원회 규정을 작성하는 풍의 활동을 하 였다. 1924년 1월 12일부터 통년 12월까지 상해 교민단의사회」二海橋民團짧事會 의 학무위원에 선엠되었으며, 임시정부의 박은식朴없뺀 임시대좁령 시기에 국 무위원에 선출되어 법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25년 3월에서 동년 11월에 이르 는기간에는만주의 항일독립운동단체의 분규를수습조정하였고, 총재인 손정 도에 이어 대한적십자회大韓*十字會의 총재 직무대행으로활동하기도하였다. 또한 1926년 안창호-의 주창에 의하여 조직된 임시정부경제후원회 발기준비위 원회에 위원으로선임되었으며, 상해 임시정부의 신임시약헌新臨時約꿇이 공포 되어 개각된 국무령 김구로부터 추천 받아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8월 이동녕이 수석 국무위원으로 있을 때 외무부장에 임명되었다. 1928년 4월에는 군무부장으로 활약하다가 1930년 9월 사임하였다. 1931년 11월 6일 그는 임시 의정원의원에선출되었으나와병으로인하여임시의정원회의에참석할수없 었다. 이후 1939년 3월 10일 상하이에서 사멍하였다. 1990년 정부에서 건국훈 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백남칠 | 백남칠白南七(1892∼미상)은고양군 연희변 아현리 사람으로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10일 정부 수립을 위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大韓民國師時議政院을 구성할 때 경상도 의원 겸 서기뿔記로 선출꾀었으며, 의정 원 내의 간부진 선거에서 이광수李光洙와 함께 서기로 피선되어 대한민국임시 정부 외무위원(서무담당)으로 임명되었다. 1920년 2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제4편 13 1운동 이후띄 국내외 독립운동 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