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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10여 일 정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가 3월 22 일을 기하여 다시 만세운동은활화산처럼 티올랐으며, 3월 31일까지 고양군 전 지역에 걸쳐 수십 차레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이러한전개양상판 경기도 남부 의 BAA유형보다는서울의 AAO 유형과 흡사하다고할수 있다. 일제가 시위운 동상황을 거론할 때 디음과 같이 서울 시내와고양군을 함께 언급하고 있는데 서도이러한특성이 반영되고있다고볼수있다. 5일 아침 학생을중심으로 하는 약4,5전의 군중이 남대문역 방장에서 소 요를일으켰으므로헌병 · 경찰관은군대와협력, 진정시켰으나저녁에 이 르러 완전히 평정해졌으므로 보병은 1개 중대를 잔류시키고 타는 전부 철 거했다.그후신내및시외고약문내각소에서소집단으로수차소요를꾀 했으나 전부 대사에 이르지 않고 진정되었다, …(중략)… 다시 23일 이후, 시내 각처 및 시돼 고약문 내 20수 개소에서 소요가 야기되고 황래의 시위 적 운동은 점차 악화되어 폭행을 하게 되었다‘65) 경기 남부지역의 안성군원곡면과 양성면, 수원군(현화성군장안면우정면) 퉁 에서는 3 월 중순 이후에 시위운동이 1000∼2000명 이상의 대규모 시위군중이 면과 변의 연합시위 형태로공세적 양상으로 시위를 전개하여 앨제 주재소, 면 사무소동의 방화, 파괴에 이르는격렬한시위로발전하여 전국에서 가장치열 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비하면고양에서는시위규모면에서 면과 면 연대시위는꺼의 찾이볼 수 없고 대부분 동리단위의 30∼40명 시위이거나 동리와 동리의 연합시위 정도에 그쳤다. 그대신 3 · 1운동기간중뿌려진지하신문,격문류중절반이상이 고 양지역에뿌려지거나게시되어시위운동을촉구했다. 이것은고양3 · 1운동이 서울과 거의 궤를 같이 하면서 서울에서 시작된 시위운동을 지방에서 자체 지 65) 「조선 3 ·1 독립 소요사건 -개황 • 사상 및 운동」(조선헌병대사령부 조선총독부 경무총감 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j 6 : 삼일운동사자료집, 1”73, 899쪽 제3편 I 3 · 1독립운동 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