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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문서 W 세브란스(Severance) 병원의 효댁인 부상자 명단 베시(F. G. Vesey) 목사와의 면담에서 얻은 진술 내용 작성일; 1919-03-29 (11) 차오균(Cha Oh Kvun): 서른여섯 살 고익쉬Ko Yang) 출신 서울에서 8, 9마일(약 12∼lSkm) 떨어진 이곳상점들은 독립운동의 일원으로 모두폐업했고, 이 지역 일본 헌 병들은 다시 상점을 개업하라는 명령올 내렀습니다 . 상점주들은 그 명령을 거절했고 다음날 약70여 병의 마을 님차들과 소년들이 마을 뒤쪽 언덕에 올라독립만세를불렀 습니다, 일본인 헌병들과 한국인 헌병들은 그들을 따라갔고 일본 헌뱅들은 마을사람 들에게 사격을 가했습니다 이 남자는 총상을 입었고 다른사람들은 또망을 갔습니다 마을사람들은 폭력을사용하지않았으며돌,막대기 퉁 어떠한무기또가지고있지않 았고다만태극기를한두개씩가지고있었습니다‘ 이사람의 진술에 따르면이 지역헌 병들은대체로친절했다고합니다 그는교회나집회에참석하지않늪인물이며천도 교 모임에는 잠시 참여했지만오랫동안은 옴담지 않았습니다 3월 2상일 병원에 온 후 즉시치료받았습니다. (12) 인통'1 }\An Tong An): 쉬네 삼 고약문〔K。1YangKoon) 출신 그는 봉퉁이로 심한 매질당한후 한쪽 팔을 칼로찔려 깊은상처를 입었습니다. 5백 명 이상의 이웃주민들 과함께 거리를시위한뒤 헌병서 밖에서 독립만세를외치고있었습니다 그는여러 명 의 일본헌병들이 일반주민복장을하고군중들사이에 있었던 것같았다고말했습니 다 헌병대의 한 판리가 시위를해산하라며 위협을 했으나군중들은 두려워하지 않겠 다며 시위 해산을 거절했습니다- 곧 5명의 기마경찰들과 총을가진 5맹의 헌병들과 20 명의 주민들(사복 차림의 경찰들)이 군중을향해 돌진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돌, 막대기 둥 어떠한무기도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종교가 없으며 3월 28일 병원에 와서 즉시 치료받았습니다.?) 베시(F. G. Vesey) 펀사와의 면담에서 얻은 진술 내용 작성일; 1919-04-01 1919년 4월 1∼5일 (4) 박윤낙\Pak Yun Nak): 스물다섯 살 고때K。 Yang)군 치두면(Oti To Mven) 도닦 기(Totangki) 춤선 이 사람은산면 교회(San Myen Church)의 신도로서 3월 말일 그의 마을과 이웃마을의 주민이 모두모여 ‘만세‘를부르며 폭력을배제한까리 시위를했습 57) 한국의 정세 [l]The K。rean Situati。n,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팎사자료집』 4 삼일 운동사자료집, 1971, 373쪽 268 고양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