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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명에서부터 많게는 1천여 명에 이르는군중들이 모여 독립만세를외쳤다.%) 이 때 독립만세를 부른 지역은 숭인면의 동묘리 · 청량리 • 돈암리, 한지면의 왕십리, 은평면의 녹번리 · 신사리 · 역촌리, 용강변의 동믹-리 · 당진리, 마 포 • 양화진, 지도면의 행주리, 연희변의 수색리 • 창천리 • 합정리, 신도변의 구파발리 둥지로많은사람들이 이날밤자정까지 독립만세를높이 불렀다 이 들지역 외에도고양군각처에서 만세소리가울렸다. 동대문밖동묘리와 청량 리 부근에서 시위 하던 군중들로, 운행 중인 전차에 돌을 던져 전차20대의 창유 리 105장을 깨뜨렸다. | 성북리 | 3월 24일 성북리에서 60여 명의 주민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 회기리 | 회기리에서는 3월 26일 15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부 르며 시위하다가 해산되었다. 이튿날인 3월 27일 밤에 미 을 주민 김원성金元成 퉁이 마을 주막 앞에서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 |제기리 | 3월 26일제기리숭인면사무소앞에서주민수백명이모여만세 를 불렀다. 이날 시위는 윌콕리의 정만산鄭萬山(34, 농업), 용두리의 최정식崔貞 핸(31, 잡화상), 안깜리의 이재성李在成(33, 연초상) 퉁이 앞장서서 시위를 주도하 다가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36) | 안감천 시위 | 3월 27일 안감리를 흐르는 안감천安#川 부근에서도 5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 안감천은 오늘날 성북구청에서 신설동 쪽으 로흐르는 내이다. | 돈암리시위 | 3월 27일돈암리에서도주민 50여명이산위에올라가만세 34)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1, 419쪽 35) 경성복심법원, 「낌원성 판결문」, 1919. 5. 21 ‘ 36) 경성지방법원, 「챙만산 퉁 3인 판결문」 , 1919. 5. 1. 246 고양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