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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고양군 용강면龍江面 창전리용前里에 주소를 두고 있던 학생 이 영준李永俊(19 세)은공덕리에서 동막리束幕里를순찰중이던 헌병 보조원 이주석을불러 세우 고 “이번 우리들 학생만으로서 소요를 피우기 시작하였으나 힘이 부족하여 각 계층의조선인이공똥으로독립운동을하기로되어드디어내일은그협의를하 게 되어 있는데 당신도조선인이라면 이때에 독립운동에 참가하파”고하였다. 또한“이 인쇄물을보라”고하며 인쇄물을주었다. 인쇄물은“조선인헌병보조 원및순사보는직장윷버리고조선민족의독립운동에힘쓰라’는내용이었다 _30) 이후용강면 일대에서는3월 23일이 올 때까지 시위운동은잠복기에 들어갔다. | 통막관란교연합시위 | 3월 23일고양군용강변동막리에서는마포와동 막을 연결하는관란교觀빼橋에서 경성부민과동막주민이 연합하여 약 500명의 시위군중이 모인 가운데 대대적 시위를 전개하였다. 동막상리 박인희朴寅홉(당 시 30세, 정미엽)는도쿄간다神田예비학교를 나온사람으로서 독렵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3월 23일 오후 7시경 관란교 부근에서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위해 모인 500여 명의 군뚱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임웅철林願喆(당시 32세, 정미업)은그시각에 서울에서 오다관란교부근에서 군중들이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는것을보고함께 참여해 만세를부르다붙잡혔다. 박인희는징역 6월, 임 응철은 태형 90도에 처해졌다. 31) | 용..AJ-과용강변동-막리사이만세시위 | 3월 26일에는용산과용강변동막 리 사이에서 300여 병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연희면 | 수색리 시위 | 3월 10일에는 연희면 수색에서 수백 명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30) 『독립운동사자료집』 5(3. 1운동 재판기록), 275-276쪽 31) 경성지방법원, 「박인회 동 2인 판결문」 , 1919. 5. 1. 제3변 I 3 · 1독립운동 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