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page

월관이란요리점을 차렸다. 원래 명월관은 옛 황토현 네 거리 즉, 지금의 세량로 139 번지 광회문 네거리의 동아 일보 본사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1914년에 화재로 갯 더미가 되었다. 안순환은 인시동 194번에 있는 이완 용이 살다나간후 비어 있 민족대표독립선언기록화 독립기념관소장 던 순화궁을 빌려 맹월관의 별관격인 태화관을 열었다. 명월관은 궁중요펙를 일반인들에게 선봐고, 궁중 나인 출신이 담그는 술을 대어 쓰는바람에 장안의 인기를끌었다. 게다가 관청에 기생을뚜는제도가폐 지되면서 어전에 나가 춤과 노래를 했던 궁중기생과 인물과 성품, 재주가 뛰어 난 명기들이 명월관에 많기로유명했다 자연 명월관은 장안 명사와 갑부들의 유명한사교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땅을팔아서라도명월관기생 노래를들으 며 취해봤으면 여한어 없겠다.라는농담을주고받을정도의 명성을 얻었다 손병희 선생은 태화관의 단골이었다. 천도교에서 해마다 여는 각 기념일 연 회를 이곳에서 베풀었다. 그렇지 않으면, 서울 숭인동 157번지 낙산 님쪽 기숨 에 있던 손병희의 별장 상춘원에서 교인들을 위해 베풀곤 했던 때연회의 음식 을 태화관에서 주문했기 때문에, 태화관으로서는 의암 손병희가 가장 큰 고객 이었다. 3월 1일은 토요일이었다. 오후 1시가 지나자 태화관으로 불교 대표 한용운 스님이 들어서는가 하면 기독교 대표 오화영 목사도 들어섰고, 첸도교의 오세 창 · 최린 · 권통진씨 퉁보기 드문손님들이 한방에 모이는바람에 주인 안순 환뿐만아니라시중드는사람들도신기하게 여겼다_ 13) “손님은 30명쯤아니 부탁한 대로 성찬을 준비해 주게. ” 13) 이난향, 「명월관」,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중앙일보 · 연월일, 610∼611확 제3편 I 3 · 1독립운동 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