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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간 만큼 이필주도구국운동의 중심에 한 발씩 다가기-게 되었다- 전덕기가 상동교회의 담임목사로 정식으로 부임하여 상동챙년학원은 전덕 기가교장을맡고, 이회영이학감을맡았다 . 그가맡은학생들야체조시간에 목 총을 메고군가를 부르며 북소리에 맞추아 행진하는훈련광경판 당시 서울에서 구경거리가되었c:+. 일제가한국을강제 병합한후상동교회를중심으로국권회꼭운동에 관여하 던이필주는 「105인사건」 등으로신변에다가온일제의 탄압위협을가까스로 피하고 40이 넘은 나이로 1911년 경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에 들 어섰다. 2년간의 공부를마치고 1913년신학교를졸업한그는새로개척한왕 십리교회의 전도사로 파송되었다. 그곳에서 전도의 많은 실적을 올렸으며, 1915년목사안수뜰받았다. 1918년조선감리회연회는독립운판을위해 휴직한 손정도목사의 후입으로 이필주 목사를 감리교회를 대표하는쩡동교회 목회자 로임명하였다. 이즈음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국내에서는 3 · 1운동아 태동하고 있었 다 . 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가 갑자기 붕어하자, 3 . 1운동 푼비 움직임은 가 속화되었다 . 일본에서 유학생들이 2 . 8 독립선언을 결행하여 3 · 1운동의 기폭 제 역할을하였다 국내는 천도교 · 기독교 · 학생측에서 게별적으로 독립운동- 계획이 추진되 어 갔다. 2월초부테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의 합작이 추진되면서 일원화의 원칙 을정하였다. 학생단은종교계 기성인사들의 계획에 합류하기로결정했다. 불 교측도 여기에 참여하띤서 민족대연합전선을 이루어지게 되었다. 2월 26일경 최남선이 선언서 초고를완료했다 27일에는천도교측으로부터 「선언서」문안 을 받아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여 검토했다. 민족대표는 천또교 15인, 장로교 · 감리교를 합한 기독교 16인, 불교 2인 등 모두 33인으로구성하였다. 천도교측 15인은손병희 • 최린 • 권통진 • 오세창 4인과함께중앙의 권병펙 • OJ-현F묵 · 이종일 · 이종훈 · 홍병7’l . 김완규와당 시에 상경해 있던 평양의 임예환 · 나인협,용강의 홍기조,중화의 니용환, 임실 의박준숭이었다 기독교에서는 26,27일에 걸쳐정동제일교회 이필주목사사 2。6 고양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