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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기도를 힘써 하고 세례문답 공부와 개인 전도에 힘을 많이 썼다. 이필주 목사는 상동교회에서 7세 연하이지만 인격과 신앙이 훌륭한 전덕기 목사와만나게 되었다. 이 만남은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다. 숨장사출신의 전덕기 목사는 1902년 전도사 안수를 받고 1903년부터 상동교회 의 담임목사가 되어있었다. 1903년4월 부활주일, 그의 나이 34세에 스크랜튼W B. Scranton 목사에게 세 례를 받고 상동교회 교인이 되었다. 주색잡기와씨움 잘하던 이필주가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전도에 나서자주변에서 큰 소란이 벌어졌다. ·‘예수 믿지 않 으면죽고야말리라.”며 위협 반, 설득반으로전도에 나서자 식구들도마지못 해 그와 함께 교회될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동네 사람들에게도 정성스럽게 전도를 하여 몇 달 안가 많은 동네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는 성경을 보다가“먼저그의 나라와의를구하라.그리하면이모든것을더회에게 더하 시리라---(마태복음6: 33)는말씀을원고홀연히군복을벗어던지고군대를 나왔 다. 1903년겨울, 상통교회에서, 예배당청소부자리를내어주었다. 선생은 청 소일뿐아니라, 스크랜턴과전덕기로부터열심히성경을배웠으며,사경회춤經 會에 빠짐없이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에 열의를 다했다 1904년 봄부터 상동교회 초둥교육기관인 공옥학교攻玉쌓校의 체육교사로근 무하기 시작하였다. 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치는 한편 목사와 같이 심방도 다니 며 점차상동교회의 주요 일꾼이 되어 갔다. 1904년 10월 15일, 상통교회 부설 교육기관으로상동청년학원이 문을 열었다 . 주시경, 장도빈, 최남선, 님궁억, 현순, 조성환둥 기라성 같은 인사들이 교사로포진한기운데 그는 체육을 맡아 도수체조 • 구기운동둥체육과목과함께군시훈련까지가르쳤다. 상동청년학 원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 이 늑결되자,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전개하면서 구국운동의 구심점씨 되었다. 김구, 이동휘, 이동녕, 이준, 노백린, 안태국, 님궁 억, 신채호, 최광옥, 차병수, 이숭훈, 이상설, 최남선, 이상재, 최재학, 김진호, 양 기탁, 주시경, 이용때, 윤치호, 이회영, 유일선 퉁이 상통청년학뭔을 중심으로 모였다. 그가 발을 들여놓은 상동교회와 상통청년학원이 구국운동의 중심이 저 ~3편 I 3 · 1독립운동 z。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