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page

에 걸쳐 서울시내 전문학교와중둥학교 학생대표들이 정동교회 내 이필주 목사 의 집에 비밀리에 쪼여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협의했던 것이다. 새로운담임 목사이필주는드라마와같은인생역정이 있었다. 지독한가난 과거친방황, 삶과죽음의그림자가그의곁을맴도는가운데,거듭남의생생한 체험을 했다. 그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양심과 신념에 충실하게 살수있었다.그의 정통교회사무실이 3 - 1운동준비장소가되었던것은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내가 민쪽을 위해서 할 가장으뭄이 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항상 염 두에두어왔습니다 내가이민족을구해낼수만있다면열번,백번일지라 도기꺼이죽을각오였습니다 10) 이필주李弼柱 목사는 1869년 12월 22일(음력 11월 9일) 고양군 한지면(현재 왕 십리 569번지)에서 대어났다. 부친 은영銀永은 한학을 한 선비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태어날 당시 섭안은 이미 쇠락했으며, 매우 빈곤하였다. 소년 이필주는 8 세부터 한문글방에 들어가5년동안한문을공부했지만,구차한집안사정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 설공장에서 실 뽑는 제사製絲일을 배워 가사를 도와야 했다. 17세에 부친을 잃었지만, 자신은 혹사병에 걸려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부친 사망 후 홀어머 니와어린동생들의생계를젊어진가장으로서무거 운책임이그를짓늙렀다.배운것도없고가진것도 없는 그는 막노동펀}을 전전하며 근근이 연명했다. 희망이 없는삶의 연속이었다. 그는실의를달래기 위해 술과 씨움질로 세월을 보냈다. 10) 「이필주자서전」, 115쪽 이팔주목사 제3편 I 3 · 1독립운동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