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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수 모양으로 줄을 대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서울 시내에서는 이 많은사람들을수용할길이 없어‘ 여관들은물론초 만원이요‘ 연훨이 닿는 친지의 내방드로 인하여 누구의 가정예서나 손님 사 태로정신을 차릴수없는지경이었다 그러고도‘ 시내의 대소도로의노면 에는 노숙하는 사람들이 또한 굉장히 많았었다 당시에는국상중일, 남자는 백립白효(흰 삿갓)에 흰 우루따기를 입었으 며, 여자들도 펀 저고리 흰 치마로 차리었으므로‘ 어디를 가나 인파를 이룬 곳은순백일색이었다 그광경은 만경창파萬t훌蒼波가 아니라설로만경백파 萬b頁g波의 장관。l었다 기회는 대단히 좋았었다 밖으로부터 민족자결의 선 풍이 불어왔고 안에서는서울이 생긴 이래 처음 A 로많은군중이 모여들어 있었드으로. 어떠한 운동이나 거사를 하기에는 천재일우의 절호한 기회였 던것이었다9) 고양출신 이필푸목샤와 3 • 1운동준비 이필주목사 고양군 한지면 출신의 이필주 목사는 1918년 6월 정통제일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유명한독립운동가인손정도목사의후임이었다. 그는8개월후 3 . 1 운동 때 천도교의 손병희, 장로교 의 길선주와함께 감리교를 대표하여 독립선언 서 민족대표의 세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 사무실은 독립 운동준비를위한중심장소역할을했다 1919년 2월 26일기독교계 인사들이 모 여 민족대표 기독교 측 인사를확정짓고, 독립선언서와독립청원서 문얀을 검토 해 동의를 받았던 장소였으며, 민족대표의 순서를 정히는 회의를 한 장소였고, 학생들의 독립운동 참여에 결정적인 협의장소가 되었다 2월 25일과 26일 이틀 9) 이회숭‘ 「내가 겪 은 삼일운동」 , 동아일보사, r삼일운동 50주년 기념논죄J, 399-400쪽 z。2 고양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