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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이만 때에는 매일 평균 l전 5백∼6백 명에 지나지 못하였는데, 금년에 와 서는 매일 평균 2천 명이요, 지나간 26일에는 별안간 1천여 명이 늘어 3천 여 명의 승객이 내렸고, 27일에는평일보다 4천여 명이 늘어 6천 명이 남대 문역에풀렸는데, 인산전날되는 3월 1일까지에 실로몇 만명이나서울로 올는지 짐작키 어 렵다 -- --- 상경한 사람 중에는 여관을 정하고 며칠을 묵 을작정을한사람이 물론많겠지만서울에 있는아는사람의 집은한집에 이삼명은보통이요십여 명씩 괴롬을기치는사람도적지 않은것이다. 이 모양으로 어느 날 상경한다는 펀지를 먼저 하여 둔 때문에 불가불-정거장으 로나아가서그시-람을반갑게맞이해야하는관계로입장권이요사이며칠 동안은썩 많이 팔리어 평일에 매일 6백 정 가량에 지나지 못한껏이 1천으 로, 2∼3천 장으로되었으니 이것만보아도시골사람이 얼마나많이 상경하 는지를짐작할것이다,8) 당시 이십대 초반 청년이었던 국어학자 이희승은 3월 3일 광듀!.(고종)황제의 국장을 보기 위해 서울에 모여든 지방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며칠 전부터 전국각지에서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인산因山을-구경하기 위하여 서울로올라오는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이러한인산은그의 의와행렬도굉장하려니와 일반국민은 한평생 이러한기회를 맏기란수월 한일이아니었다 그러으로누구든지 이러한구경은불가불한번하여두 어야하겠다는생각을가지고있었다 그리하여. 극빈자가아닌 이상,서울 로 오지 않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필자의 가족도 상경한다는 통지를 받고‘ 서울역에 마중을 나갔던 일이 있었다. 이때에 직접 본 광경이지만, 서울로 밀려드는 승객을 운반하기 위 하여 임시열차가뺑들이로도착하였으며,서울역 출구에서는인파가마치 8) r매일신보」 ' 1919. 3. 1 제3변 I 3 · 1독립운동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