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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사이에 숨 가쁘게 전문이 오간끝에, 결국 왕세자의 결혼식을 연기하고전 황제 서거 소식을공식 발표하는것으로정리되었다. 그 렇지 않으면 새어나오는 소문을 막을 방법이 없었고, 그때에는사태가 어디까 지 악화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왕세자의 혼인은 1920년 4월 28일로 1년 여후로연기되었다. 일본정부와조선총독부는원래보다하루늦춘 1919년 1월 22일 광무(고종)항제가 승하한 것으로 공식 발표했다. 돌연한광무황제의 숭하소식에국민들은놀라지 않는사람이 없었다. 충북 에서는 “이태왕천하의승하의보가전해지자상하일반이경Q_l하였다 •• 하며유 신영(1853-1919)이리는 노인은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남 긴 유서가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 유서에서 당시 우리 국민들이 느 낀 충격과 민족적 슬픔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나라가없으나임금은있어복국(나라를되찾는것 필자)필까기다렸더 니 시방은상황돌아감이 쓸 데 없으니 어찌 사노‘ 이러므로 인산날로죽기 작정하니 세싱-은 하직이로다 ’- _ 3) 총독부 딩L국은 광무황제의 사망원인을 뇌일혈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일제 에 의해 강제 %템를당L하고절치부심하던황제의 갑작스런푹음은 여러 가지 추측과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왕세자가 일본 왕실의 왕녀와 정략적으로 결혼 하게 되자 그 혼례를 좋아하지 않아서 자결했다는 소문도 나돌았으나, 그중에 서도민간에게 ‘팍살설‘이 퍼져 나갔다. 광무황제가 일본인들띄 사주를 받은 측 근 간신배들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것이다. 이 소문은 식민지 지배하의 민족적 울분을 촉발시켰으며, 이로 인해 배일시장이 폭발적으로 비둥-하게 되었다. 강제병합으로3싸작위를받았던민영휘는광무황제의사방소식을듣고궁 으로달려갔다. 二l가달려갔을 때 이미 황제는전신이 마비되어 입도뺑긋하지 못했다 황제는양위탕養몹傷한사발을먹고난후한시간도못되어현기증과 3) 독립기념관 소장 유신영유서. No. 3018 198 고양 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