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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fi짧의 부정행위를 징계하기 위해 면사무소를 습격했다 . 석교 헌병출장소원이 해산을명하고진압하려 하자주민들은더욱격앙하여 면장을끌어내어 때리고 다시 맹렬한기세로헌병출장소를습격하려다진압되었다. 같은 해 5 월 28일 강원도 춘천군 서하면사무소에 안보리 농민 350여 명이 몰 려가화전을금지하는 「산림산야경작제한령」에 항의하는시위를 일으켰다. 6 월초에는원산헌병분-대관내문천군운림면신창리헌병파견소를부근농민 20 여 명이 습격해 파견대를파괴한 뒤 헌병과 보조원 한 명을 인사불성이 되도록 때린 일이 일어났다. 목포에서는 철도공사 인부 백수십 명이 쌀집을 습격하였 고부산,서울,원산둥지에서대중의궐기를호소하는전단을뿌리기도하였다. 이 시기에 지방민뜰이 무곡상이나 일제 관권에 대해 얼마만큼 반감을 갖고 있었으며,그것을얼따나강력한형태로표출시키고있었는가히-는것을위의 여러 사례들이 말해 주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동맹파업 또는 임금투쟁도 급증하고 있었다. 1916년도와 1917 년에는8건이었으나 1918년도에 가서는 50건으로파업이 급증한 것이 이런사 정을반영해준다. 1918년 8월 5일에는쌀값 폭동으로살 수 없게 된 한국인 노동지-300∼400 명 이 부산역 앞에 모여 쾌 1 시위를하고동맹파업에 들어갔다 . 이들은각운송점 의 짐꾼들이었다. 서울의 경성전기회사 치장과 운전수들도 쌀값 폭퉁으로 살 수 없다며 파업을 하썼다. 일반적으로 가을 추수기가 되면 햄쌀이 출고되기 때문에 쌀값이 떨어졌다 그러나 1917년 그해에는 10월 들어서서도 쌀값이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올라서 1섬에 14∼15원이었던쌀값이 23∼24원까지 뛰었다. 1918년이 되어도 쌀값오름세는꺾이지 않고계속되었다. 특히 1918년8 월에 접어될자 1섬에 29 원 59전하던 것이 37원 46전으로, 300/o 가까이 대폭둥했다. 그 전년인 1917년 초에 비하면 2.5배가 띈 것이다 특히 1918년에 들어와쌀값이 폭동하게 된 데에는 일본 정부의 농간이 개입 되어 있었다. 일본에서 쌀투기로인해 쌀값이 폭등하자‘미소동米짧때 l’이라하 여 쌀로 인해 전국적인 소요가 일어났다. 일본 노동자들이 쌀집을 습격하여 난 제3편 I 3 · 1독립운동 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