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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접하자, 안중근은사격의 명수로서 이토처단작전에 초빙을받고자원하였 다. 연해주 의병의 동L지이기도한우덕순과함께 1909년 10월 21띨에 블라디보 스토크역을 출발하여 중국과의 국경지대인 포그라니치나야(중국명 쑤이펀허시 *쨌빼)에서 유통하를 통역으로 합류시켰다. 하얼빈에 도착한 익품근 일행은 국민회 하얼빈 지회 회장인 김성백의 집에 머물며 조도선을합류시키고 거사계 획을점검하였다. 이토의 행로가보안에붙여져 알수없는상황에서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蔡家構역에서 대기하였고 안중근은 하얼빈역을 담당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일행은 10월 18일 따렌大連에 상륙하여, 뤼순旅順 • 펑티엔泰 天 • 무순械順을거쳐, 10월 25일밤창춘長春에도착한뒤 러시아귀빈열치편으 로 갈아타고 26일 아침에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안중근은 역구내 잣집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다렸다. 아침 9시 무렵 하얼빈 역에서이토를 태운특별열차가멈추자대기 중이던러시아대장대신코코프체 프가열차에올라회담을마쳤다 이토가수행원을거느리 고 코코프체프의 안내를 받으며 열차에서 내려 러시아 의 장대를 사열하고 각국 사절단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받기 시작할 때 안의사는 의장대 뒤에서 이토와 10여 보 떨어진 지점에 이르자 권총을쏘아 3발을명중시켰다. 안중근의 사는 ‘코레아우라!(대한국 만세!)’를 3창하고 현장에서 체포 되었다. 치명상을 입은 이토는 20분 만에 절명하였다. 하얼빈은 러시아 판할지였으나 러시아 관헌은 안중근을 일제에 넘겨 일제 관펠지인 뤼순旅順으로호송해 버렸다. 이 로써 예상과 달리 안꾀사의 공판은 뤼순의 일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진행되었다. 재판을 받는동안 안중근 의사는 대한의군의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이토를죽 였기 때문에 형사범이 아니라전쟁포로로대우해줄것을주 장하였다. 안중근의 째판을보도한 영국신문 『TI1e Graphic』 (1910년 4월 16일자)자는 ‘세계적인 재판의 승리지는 안중 근이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자랑스럽게 법정을 떠 묘털;근으|사 제2편 | 국권회복운동 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