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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해산과의병운동의 격렬화 군대해산과시위대 군인들의 시가전 일본은 인천에 구축함 3척을 정박 대기시키고, 한국 연안에 제2함대를 초계 시켜 7월 31일까지 일본군의 병력 배치를완료하였다. 그리고7월 31일 밤중에 우리 조정을위협해 군대 해산에 대한황제의 칙령 반포와 동시에 군대해산 시 에 발생하게 될지도모를 한국군의 봉기를 철저히 진입L해 줄 것을 이완용의 이 름으로 통감 이토伊蘇빡文에게 의뢰하였다. 8월 1일 오전 8시, 한국군 사병들에게는 도수교련徒手敎練을 한다며 각 부대 장교와 일본 교관파 인솔 아래 비무장의 맨손으로 동대문근처의 훈련원(현 국 립의료원자리)에 모이케 하였다. 종로에서 시위 군중과함 께 일본경찰과총격 전을벌여 명성이 높았던제1연대제3대대와평소배일부대排日部隊로 지목되 던 임재덕林在i:S:. 휘하의 제2연대 제3대대 군인들도 훈련원에 집합하였다. 그러나제1연대 제1대대와제2연대 제1대대는불참했다. 전평이 동분서주하 는사이 남대문쪽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군대 해산식은서둘러 끝냈다. 병사들 에게는이른바은사금恩l없金이라는이름으로몇푼지폐를지급하고는어깨위 일제에 의한 군대해산을 죽음으로 항거한 박성환대장 l씨「빈 126 고양독립운동사 에군장도떼어내게 하였다. 병사들은그제야군 대해산사태를깨달았다.그러나이미완전히무 장해제를 당한 몸인데다가 기관총으로중무장한 일본군부대가훈련원을 이중삼중으로포위하고 있아서 어찌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8월 3일부터 차례차례 지방진위대들도 해산시켜 나갔으며 9월 3일 마지박으로북청진위 대를해산시킴으로써 대한제국꾼대는완전히 무 장해제 되고 일본군의 무력에 장악되었다. 훈련원에서군대해산식이 있던날시위대제1 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은 군대해산을 거부하며 유 서를 남기고권총으로자결했다. 제1대대사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