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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 황궁 앞으로 시위행진을 했다. 비분강개한 애국지사들은 가두에서 일본 의 만행을규탄하는불같은 연설을토해 내었다. 밤 11시경에는왕궁을 에워싸 고결사회決死會를구성했다. 그러나다음날인 7월 19일, 광무황제는다음과같 은 칙령을 발표하고 7월 20일에 퇴위하였다. 오호랴, 짐이 열조의 기업基業을전수한지 40여 년동안에 어펙움이 많았 고매사에뭇대로됨이없었다 생각컨대이제까지짐은민족의앞날을위하 여 필요한 적재돼 인물을 만나지 못한듯하다. 사회의 불안은 날이 갈수록 심각하여졌으나 이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하였다, 지금까지 어려움은우리를 짓눌러 왔으나백성들의 곤궁함과치자治者의 피곤함이 오 늘과같이 심한적이 없었다. 짐의 마음은두려읍기가마치 깊은-물위의 살 얼음위를걷는껏과같다 짐의신하들은피곤함에그직무를게을리하였고 이제퇴위를하기에이르렀다 이에짐은국가의대사를황태자보하여금대 리케 하노니 궁내부의 장례원은 이들을 세세히 처리할 것을 명하노라 7월 19일 0시부터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보병 2개 중대까 황궁 주위를 에워썼다. 그날오후 5시, 다시 한국 군인 100여 명이 군영을 탈출해 시위군중 과함께 일본경찰에 대항해 전투를벌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정부 2명,순사 1 명 한국 순검 2명이 즉사하였다. 또한 밤에는 일진회의 기관지 푹민신문사國民 新聞社를 습격해, 건물을 파괴했다. 7월 20일 아침에 황제의 양위식이 있은 날 결사회’를표방한군중이 서소문 밖총리대신이완용-의저택을불살랐으며 시위보병대병사약 :)O명이종로순 사 파출소에 총격을 가했다. 21일 밤 10시경, 결사회원들은 내부대신 이지용李 ~Jl:鎔 • 이근택李根澤 및 이근호李根細의 저택에도불을 질렀다. 18) 18) 독립운동사펀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의병항쟁사자료집, 1971, 680∼681쪽 제2면 | 국권회복운동 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