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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일념으로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항상 동지들을 규합하여 불구가사하고 사재를 쾌척하면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왜경에 쫒겨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5년에 길림시에서 광복회조직에 참여하고 권총을 휴대하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7년 8월에 군자금과 독립사상 고취를 목적으로 국내로 잠입하여 전국각처에 유지들을 규합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며 전국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여 조선독립군정서와 상해임시정부로 송금하는등 많은 활동을 하셨고 1920년에 광복회 산하 투쟁단체 주비단을 조직하여 활동을 하다가 동년 10월에 충남 강경에서 피체되어 다음해 4월 13일에 경성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고 당시 동지 안종암 소진형 장을규 여준현 신석환 이민식 이규승 김석진 김ㅁ한 유병의 심영택 이상만 권영만 우이견등과 같이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도 끊임없이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광복을 맞으셨다. 공은 한산이씨와 혼인하여 서자 학용과 손자 해송 해석 해창이 있다. 공은 1951년 12월에 서거하셨으니 향년 64라. 국가에서도 공의 혁혁한 업적을 인정하여 건국포장 1389호와 건국훈장 애국장 641호를 추서받고 서자 학용보가 선고의 묘에 불후의 입비를 계획하고 불녕에게 비문을 청하거늘 그 효성이 지극하여 지에 감히 약술여우하고 다음과 같이 명한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