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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환은 전북 익산(益山) 사람이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1년 독립운동을 펴기 위해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그후 길림성(吉林省) 길림에서 주진수(朱鎭洙)·손일민(孫一民)·우재룡(禹在龍) 등이 조직한 광복회(光復會)에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1917년 군자금 모집과 독립사상을 고취할 목적으로 입국하여 동지인 이민식(李敏軾)·장응규(張應圭)·여준현(呂駿鉉)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여 항일활동을 폈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7월에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일부 인사들과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이 제휴하여 결성한 혁명단체로서, 만주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의 혁명기지를 발단으로 하여 적시에 폭동으로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16년부터 전국 각처로 조직을 발전시키는 한편 만주로 서간도(西間島)·안동(安東)·장춘(長春) 등지의 독립군 기지와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 군자금 모집 및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폈다. 그러던 중 1918년 동회의 조직이 노출되어 다수의 동지들이 일경에 붙잡힐 때 그는 몸을 숨기고 있다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동년 음력 8~9월경 우재룡·소진형(蘇鎭亨)·권영만(權寧萬)과 안종운(安鍾雲)의 집에 모여 전국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할 것을 협의하였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 및 독립군정서 명의의 군자금모집요구장 19통을 작성하여 논산(論山)군의 부호들에게 우송하였다. 이재환은 논산의 부호인 김재엽(金在燁)·김유현(金裕鉉)으로부터 거액의 군자금을 수합하여 임시정부 요원 김규일(金圭一)에게 전달하였다. 그후 이들은 군자금 모집을 더욱 조직적으로 펴기 위해 1920년 음력 2월 장응규를 상해에 파견하였다. 장응규는 임시정부로부터 국내에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할 것을 의뢰받고 귀국하여 동년 음력 6월 서울 연지동 경신학교 교정에서 심영택(沈永澤)을 단장으로 주비단을 결성하였다. 이재환도 이에 참가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계속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