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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과 민주건국의 지도자 - 고하 송진우 선생 / 1890.5.8.(음) ~ 1945.12.30. 그의 일생은 종이와 떠날 수 없다. 종이에 먹칠하는 것이 그의 일생 사업인 까닭에 언제나 종이를 놓을 수 없다. 그는 부하, 많은 기자들에게 언제나 입에 익어 저절로 나오는 부탁은 '들고 쓰라'는 것이다. 들고 쓰라는 것은 언제나 붓과 종이를 땅에 놓지 말고 그 좋은 생각들을 계속 써서 발표하라는 말씀이다. 송진우는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에서 태어나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한 후 중앙학교와 동아일보를 무대로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에 독립운동가, 교육가, 언론인, 사상가, 정치가로 활동하였다.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의 초대 당수였으며,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의 한사람이었다. 일본 유학 후 귀국, 1916년 김성수와 함께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학감(學監)에 이어 교장이 되었다. 정의론과 이상주의를 바탕으로 우드로 윌슨 미국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1919년 3.1독립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1년반 동안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났다. 1920년에는 학교 설립 모금운동을 하다가 감시하던 경찰에게 붙잡히기도 하였다. 그 뒤 김성수 등과 동아일보를 창립, 동아일보 사장, 주필, 고문 등을 역임하며 언론활동에 주력하였고, 실력 양성이 민족의 독립을 가져온다는 신념하에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기성회운동 등에 참여하엿으며, 브.나로드운동 등을 지원하였고 태평양전쟁 전후에는 병을 핑계로 창씨개명과 일제와의 협력을 거부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는 정부가 없던 암흑시절 수차례의 옥고와 구금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를 짊어진 채 국내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광복 직전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권인수를 제의받았으나 거절하였고, 광복 직후 여운형으로부터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를 요청 받았으나 일축햇다. 이후 여운형, 박헌영 등의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항하여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조직, 임시정부 법통론을 주장하며 참여를 거부하였다. 9월 16일 한국민주당이 창당되자 초대 수석총무(당수)에 추대되었으며, 45년 12월 1일 복간된 동아일보의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고하는 해방 직후 가장 강력한 이 두 기관의 대표로서 해방정국을 이끌면서 민주국가 세우기에 앞장섰다. 그러나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결정했다는 신탁통치 찬반 문제를 놓고 신중한 반탁을 주장하면서 반탁의 방법문제를 논의, 건국사업에 진력하다가 12월 30일 오전 6시 15분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 유근배 등 자객 6명의 저격을 받고 서거하였다. 근대 한국역사상 첫 정치적 암살의 희생자였다. 아호는 고하(古下)이다. 아명은 옥윤(玉潤), 애칭은 금가지, 의병장 기삼연(奇參衍), 김직부(金直夫)의 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