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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 선생 송군의 비 우인(友人) 동래 정인보 찬 세란(世亂)이 오래일수록 선비는 자수(自樹)하지 못할까 근심하여 절조로 자랑을 삼으나 능히 경륜으로써 대사를 이루는 이는 적은데 이 절조와 경륜을 겸비한 이로 내 친구에 고하 송군이었다. 군의 휘는 진우로 담양에서 출생하니 갑오난때 5세라. 그 뒤 동향 선배로 항일의 의병을 일으킨 이 많아 풍렬(風烈)이 산천을 덮었으므로 군의 지향(志向)도 이라하여 일찍 싹텄다. 부 壎(훈)은 문유(文儒)의 사로 군도 이에 물들었더니 이때 창평 고씨댁에서 김성수군과 영어를 수학할 새 양인(両人)은 심교(深交)를 맺어 일본에서 동학(同學)하고 돌아와서는 이 나라 독립달성의 기본 방책은 교육 언론 산업의 개척 진작에 있음을 확신하고 중앙학교의 경영과 동아일보 급 경성방직의 설립 계획 등 기타 대소사를 다함께 하였다. 그 중에서도 동아지(東亞紙)는 가장 힘드린 것으로서 여기를 발판삼아 민족정기와 독립사상을 고취 배양하였다. 이에 해내외(海內外)의 민심이 귀일하니 엄연(儼然)한 민족대표 관이 오 형태없는 정부를 이루었다. 군은 옥에 갇히기 세 번 그때마다 김군이 대신 교장 사장이 되어 출옥을 기다렸다. 군의 전공은 법과이나 경세 방략에 더욱 유심(留心)하고 담사감개(談史感慨)를 즐겼다. 기미독립선언 때 군은 중앙학교에 있은지 3년이라 전년에 구주(殴洲)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론이 일어나매 원근(遠近)에서 은밀히 하는 연락이 모두 중앙학교로 집중되었거니와 학교의 숙직실은 군이 거처하던 곳이라. 김군과 현상윤 군이 항상 여기에 모여 이르기를 이미 자결이라 하였은즉 이 기회에 행동하면 우선은 헛되히 죽더라도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