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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에는 없었던 현충시설 안내판. 현충시설로 등록된것이다. 이상관선생 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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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상관 선생(1890-1936)은 1890년 4월 1일 경남 밀양군 부북면 퇴로리에서 출생하여 1918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 이시영 선생과 함께 생활하면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1928년 39세 나이로 중국 남만주 환인현 일대에서 정의부 지방행정부 조직 당시 환인현 남구총관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사자금과 군량비를 모으는 일에 전념하였다. 1931년 12월 17일 국민부의 간부 개선 후 조선혁명부 각부대 회의를 열어 양세봉을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추대하고 참모장에 김학규, 국민부 위원장에 김동삼, 재정부장에 이상관등이 임명되었다. 독립군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관할지역내 한인에 대하여 호당 1년 2월의 세금을 매년 징수하고 조혼, 술주정, 아편, 도박자 등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벌금을 내도록 하여 동족간의 일체감 형성과 애국심 고취를 위하여 노력함은 물론, 떄로는 상인으로 위장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인, 신빈등 11개 현을 다니면서 모연조직을 배치하거나 재정에 관한 기율을 점검하였다. 일제와 위만주국 군경은 조선혁명군이 엄중한 형세를 처해 있으면서 활동을 계속 전개하는 것은 재정부장 이상관의 역할이 분명하다고 판단하고 거금의 현상금과 특무원까지 특파하여 이상관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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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이상관이 자진 투항하도록 하기 위하여 죄없는 가족들까지 환인현성으로 압송하여 헌병대에 구금하고 갖은 고문을 서슴치 않았다. 1936년 12월 15일 일본군 동변도 특별공작부 환인지부 황도천공작원 정만기등에 발각, 체포되어 환인현 헌병대로 압송된 후 봉천 북대영에서 일제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조국을 위하여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