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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주재 이공 시의 내력 낙주재 이번(1575~1632)공은 효령대군의 7대손으로 이진왜란때 선조 임금의 호종참모장으로 선무원종1등)에 녹훈되었다. 인목대비의 모친 부부인 노씨와 이종간이며 광해5년)1613) 계축옥사때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집과 친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파직당하였다. 부부인 노씨가 제주도에 위라치 당할 때 수행하였다가 광해11년 기미(1619) 상경할때 낙동강 해양원이 있는 이곳 뢰진의 평화로운 풍광에 취해 정거할 뜻을 읊은 시다. 뇌진은 일찍이 탁영 금일손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 등 큰 선비들이 노닐던 유서갚은 곳이었다. 공은 상경 후 서궁을 남몰래 드나들며 인목대비를 모시면서 인조외사촌인 구인후 등과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마침내 성사시켰다. 인조2년(1624) 정사공훈록에 공을 기록하고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이곳 녹진에 내려와 관란정을 지어 은거하였다. 그후 인조가 중용코자 관직을 내리고 예관을 보내어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였으므로 예조에 강호도를 그려 올리게 하여 받아보고 인조5년(11627)에 인조친필인 금지옥엽 및 사액호 낙주재와 주변 토지를 하사하니 이때부터 사호인 낙주재를 재실명으로 개핑하였다. 시 서둔낙장은 이 무렵 인조3년 을축(1625)에 작시된 것으로 나주재공의 굳은 절의를 엿볼 수 있ㄷ. 이곳 지명은 원래 미래였으나 왕명을 받은 예관이 찾아왔다하여 역례라 불리우다가 고종말년부터 명례가 되었다. 공의 타고난 성정은 솔직담백했고 품은 뜻은 지취높고 원대하였다. 밀양 김해 함안등 세 고을의 향안에 이름이 올랐으며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