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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장은 이곳 밀양시 내이동 901번지(노상하1길 25-12)에서 9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약산((若山) 이라는 호는 중앙중학 시절 백민 황상규로부터 받아 사용하였다. 밀양공립보통학교 시절부터 남다른 민족의식으로 이목을 집중시켰고, 동화학교, 서울의 중앙학교에서 수학한 후 덕화학당에서 독일어를, 금릉ㄷ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애국 문학청년이었다. 남경 금릉대학 재학중 고모부이자 스승인 백민 황상규의 부름을 받아 만주로 이동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한 뒤 길림에서 '의열단'을 조직 의백이 되었다. 1935년 7월 5일 의열단이 해체될 때까지 23차례의 의거를 지휘해 당대 최고의 현상금이 걸린 독립투사로 일제에게는 두려움의 상징이 되었다. 약산은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에서 수학하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장,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조선의용대 총대장,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역임하는 등 일생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온전히 바친 민족의 영웅이었다.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그 어떤 주의와도 타협하였고 그 누구의 손도 잡았던 진정한 민족주의자였다. 투르케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을 좋아하고 톨스트이라면 무조건 읽었던 약산 김원봉 장군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이 없었더라면 이름난 문학가로 역사에 남았을 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원의 영웅이었으나, 역사 속에서 위대한 독립투사로 살아나리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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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산 김원봉(若山 金元鳳, 1898~1958) 밀양시 내이동 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