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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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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김해지역은 옛부터 기름진 농토에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제방과 수리시설 확충으로 수많은 농경지가 생겼다. 하지만 소유는 대부분 일본인에게 들어갔다. 해방과 더불어 많은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주인 없는 이 토지를 주민들께 부상 배분해 준다는 등 감언이설로 선동하여 사회를 어지럽게 하였는데 그 후 이념갈등을 극복하고 화합과 통합을 목적으로 결성된 국민보도여연맹이 한국전쟁 발생으로 대학살의 기초가 되었고, 우리지역은 임시수도 부산과 경계를 한 후방지역임에도 피할 수는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내무부 치안국장 명의로 (전국 요시찰인 단속및 전국형무소 경비건) (경서수 제1799호)이라는 제목의 비상통첩에 따라서 집행 ●인민군의 위협여부와 관계없이 전국적으로 진행된 점은 국가의 조직적 명령에 의해 약 80일간 장기간 계속되었다. ●1960년 4.19이후 김해유족회와 금창장의위원회(진영, 대산 등)가 결성되어 김해읍 남산(현 시청자리) 설창리 산36-1번지에 합동 묘를 만들고 추모비 설치와 학살자를 색출하여 재판 청구 계획이었으나 1961년 5.16발생으로 중단 ●5.16군사 정부는 2곳 합동 묘를 파헤쳐 흥동 화장장에서 화장 후 어떻게 하였는지 알지 못하고 모든 서류와 금전은 몰수되고, 관련자는 연행, 구속됨 ●부역자 명부를 만들어 1976년까지 계속하여 가족을 감시하고, 시회 진출시 신원조회에 불이익을 주었다. ●화해를 위한 권고사항(과거사진실위원회) - 국가의 공시사고 - 위령사업지원 -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 역시기록 수정 - 평화인권교육강화